“예, 아니오, 그리고 글쎄요”

2007. 5. 11. 00:43아름다운 글

“예, 아니오, 그리고 글쎄요”
이계숙 시민기자 칼럼
2007-05-09 18:02:50 function sendemail(w,h){ var sWinName = "emailarticle"; var cScroll = 0; var cResize = 0; var cTool = 0; var sWinopts = 'left=' + ((screen.width-w)/2) + ', top=' + ((screen.height-h)/2) + ', width='+w+',height='+h+', scrollbars='+cScroll+', resizable='+cResize; window.open('./?doc=function/mail.php&bo_table=column5&wr_id=93',sWinName,sWinopts); } function sendprint(){ var sWinName = "printarticle"; var cScroll = 1; var cResize = 1; var cTool = 1; var sWinopts = 'left='+0+', top='+0+', width='+720+', scrollbars='+cScroll+', resizable='+cResize; window.open('./?doc=function/print.php&bo_table=column5&wr_id=93',sWinName,sWinopts); }
“예, 아니오, 글쎄요” 중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어떤 대답에 익숙한가?

이성에 눈뜨기 시작하는 청소년기에 학교선생님께 들은 얘기다. 학창시절 이성교제는 중차대한 학업에 필시 방해가 되므로 남학생이 다가와 데이트신청을 하면 ‘글쎄요’라고 대답하지 말고, 반드시 ‘아니오’라고 단호하게 말해야 그 녀석이 더 이상 여학생에게 접근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글쎄요’는 긍정인지 부정인지 언뜻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에 수줍은 여학생은 그 남학생이 속으로는 좋은데 겉으로는 쑥스러워 내숭떠는 대답이라고 생각하여 더욱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치 늑대의 무리로부터 어린 양을 보호하듯 자라나는 호기심을 ‘학업’이라는 대의명분으로 꼭꼭 묶어둔 어느 선생님의 의지와는 달리 질풍노도의 사춘기 급우들은 단호한 표현인 ‘예, 아니오’ 보다는 묘한 뉘앙스를 가진 ‘글쎄요’라는 말에 더 재미를 느끼고 친근감을 가졌던 것 같다.

무엇이든지 배우면 마치 스폰지처럼 받아들이는 어린 시절 이 같은 선생님의 철저한 훈육 덕분인지 어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습관적으로 ‘글쎄요’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 사람들이 적잖다.

‘모르면 중간이나 가지’ 라는 불문율이 ‘글쎄요’를 애용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강의 중에 질문을 받아도 엉뚱한 대답을 하면 웃음거리가 되지만, ‘글쎄요’라고 하면 청중들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까 일단 위기는 모면하게 된다.

그런데 ‘글쎄요’가 항상 안전장치인 것만은 아니다. 면접시험을 볼 때 ‘글쎄요’라고 하면 십중팔구 낙방한다. 학교든 회사든 확신이 없는 사람을 환영하는 곳은 없으므로.

또한 대화를 할 때 ‘글쎄요’를 빈번하게 말하는 친구와는 마음을 열고 진지한 상담을 하기 어렵다.

가령 자신이 무엇인가 절박하고 중대한 판단을 해야 하는 시점에서 확신이 없어 상대방의 조언을 구하거나, 더 나은 판단을 기대하고 자신의 얘기를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는데 ‘글쎄요’라고하면 가소롭다는 것인지, 빈정대는 것인지, 아니면 더 생각중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고민을 해결하고자 상담을 했는데 복잡하게 상담자의 마음까지 읽어야하는 고민 하나가 추가되는 셈이니 도대체 ‘영양가 없는 친구’라고 치부해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글쎄요’ 마니아는 상대방에게 자칫 잘못 말하다가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마음의 상처를 줄까봐 조심하는 것이라고 반박할 것이다.

그러니 당장의 대답이 어려우면 충분히 숙고한 후에 좀 지나서라도 명쾌한 답을 주어야 마땅하다. 적당히 얼버무려서 곤란하고, 심각한 상황을 회피하는 태도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엄밀히 말해 무성의한 것이다.

예로부터 은근과 끈기를 자랑하는 한국 사람들은 완곡한 어법이나 애매모호한 뉘앙스로 자신의 마음을 슬쩍 감추기를 좋아하는 버릇이 있다.

사람을 바로 앞에 놓고 직선적인 표현을 하면 상대방이 무안할거라고 생각하여 술의 힘을 빌려 용기를 내는 사람도 그 맥락은 같다.

그러나 변화무쌍하여 빠른 변화에 대처해야 하는 요즘은 직선적이고, 단호한 표현이 생뚱맞다고 하면서 연막(煙幕)을 친 것처럼 얼버무리는 태도가 미덕인 시대가 아니다. 우회적인 표현은 쌍방의 감정과 시간낭비를 초래한다.

가령 한쪽은 직선적인 표현을 잘 하는데 다른 한쪽은 우회적인 응답에 익숙한 두 남녀가 교제를 하면 늘 서로 빗나가는 대화를 할 것이고 상호간 이해부족을 초래하여 잘만하면 천상의 배필이 될 지도 모르는데 한낱 스쳐가는 인연이 되고 마는 애석한 경우도 있다.

또한 몇 해 전 인터넷에서 본 얘기인데, 스스로 살이 많이 쪘다고 생각하는 여학생이 다이어트와 운동으로 체중감량에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데 친한 친구에게 제법 얇아진 허리를 내밀면서 “이만하면 됐어? 쓸 만 해?” 라고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한결같이 “글쎄, 그런 것도 같고”라고 하는 바람에 그녀는 줄기차게 무리한 다이어트를 계속하다가 영양실조에 걸려 쓰러졌는데 당시의 체중은 표준에 미치지 못한 정도였다고 한다.

‘글쎄요’가 아니라 명쾌하게 ‘그래, 맞아’라고만 긍정해 주었더라면 그런 불상사는 없었을 텐데..

자신이 어느 쪽에 적성이 있는지 확신이 없는 수험생이 성적도 신통치 않고, 그때까지 특별한 재능도 발견되지 않아서 고민하면서 주위 어른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경우에도 조심스런 사람들은 자칫하면 나중에 원망이라도 들을까봐 확실한 얘길 주저한다.

가령 무용에는 소질이 없고 문학이나 미술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학생이 선생님께 자주 혼나고, 기죽으며, 율동을 하느라 뻣뻣한 팔다리를 혹사시키고 있는 게 보기가 안타까워 수십 년 더 산 인생 선배의 안목으로 “네 적성은 춤이 아니고 문학이나 미술 쪽에 아주 탁월해. 지금이라도 방향전환 해봐” 라고 단호하게 코멘트 해 준다면 그 아이는 더 이상의 시간낭비를 멈추고 자신감 있게 인생을 헤쳐 나아갈 것이다.

아무리 어린 사람이라도 코멘트는 상대방에 대한 꾸준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 사람만이 해줄 수 있음을 안다.

무언가 확실한 판단이 필요한 시점에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충분히 고민하고 진지한 답변을 해주는 것이 어른다운 태도이다.

명확한 의사표현이 상호간의 신뢰와 안정감을 준다. 그러나 더러는 상호간의 의사소통이나 동의를 구하는 대화에서 ‘예, 아니오’ 보다는 ‘글쎄요’가 나을 때도 있다.

직장 상사에게서 곤란한 질문이나 주문을 받았을 때 그냥 ‘예’하고 긍정하면 비굴한 예스맨이 될 것이고, ‘아닌데요.’라고 하면 반골기질을 가진 부하로 낙인이 찍힐까봐 진퇴양난에 빠져 고민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때는 재치를 발휘하여 “글쎄요. 당장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좀 더 충분히 생각을 해보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하면 비굴도, 반항도 아닌 깊은 사려와 성실성이 돋보이게 된다. 물론 추후 심사숙고한 후의 대답은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당장의 대답을 요구받는 경우도 있고 급박하게 판단을 해야 하는 때도 있다.

그런 경우 가능하면 ‘예, 아니오‘로 선명하게 응답하되, 긍정이나 부정으로 답하기 곤란하면 간편한 ’글쎄요‘로 얼버무릴 게 아니라 답변을 유보한 것에 납득할 만한 부연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사람의 표현방식을 보면 그의 삶의 방식을 엿볼 수 있다. 긍정이나 부정의 의사표시가 확실한 사람은 대부분 적극적인 삶을 산다.

반면 애매모호한 불투명한 ‘글쎄요’를 즐겨 쓰는 사람은 소극적인 편이며 자칫하면 우유부단하거나, 음흉하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이왕이면 적극적이며 그 무엇도 겁나지 않는 도전적인 삶이 아름답지 않겠는가. 십년동안 잘 굴리지 않고 드문드문 묵힌 차보다 사력을 다해 엔진을 소모한 차는 버려지는 최후의 순간에도 그리 아쉽지 않은 것처럼.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인간관계의 신뢰를 구축하는 데 ‘글쎄요’보다는 ‘예, 아니오’로 자신의 의사표현을 명확히 하는 게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본다.

답변유보인 ‘글쎄요’라고 하면 상대방이 얼마나 오랫동안 고민할까를 헤아려보자. 특히 익숙하고 친밀한 사람끼리의 언어생활은 쌍방의 성실하고 따뜻한 배려
이계숙(공주시 농업
기술센터 홍보담당)
가 전제되지 않으면 탄탄한 사이라 해도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뒷감당이 두려워 엉거주춤하고, 미온적인 표현을 즐겨하는 사람은 어느 쪽으로든 변수가 많음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누군가로부터 신뢰를 얻고 싶다면 회색인의 어중간함을 버리고 자신의 의사를 당당하고 명쾌하게 표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할 것이다.
< 공주뉴스=이계숙시민 기자/ news@gongjunews.net> >> 이계숙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