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는 자연과학이다(20)

2007. 5. 12. 23:13아름다운 글

풍수지리는 자연과학이다(20)
이원행의풍수..준경묘,영경묘(濬慶墓,永慶墓) 답산기
2007-05-12 00:46:22 function sendemail(w,h){ var sWinName = "emailarticle"; var cScroll = 0; var cResize = 0; var cTool = 0; var sWinopts = 'left=' + ((screen.width-w)/2) + ', top=' + ((screen.height-h)/2) + ', width='+w+',height='+h+', scrollbars='+cScroll+', resizable='+cResize; window.open('./?doc=function/mail.php&bo_table=poong&wr_id=34',sWinName,sWinopts); } function sendprint(){ var sWinName = "printarticle"; var cScroll = 1; var cResize = 1; var cTool = 1; var sWinopts = 'left='+0+', top='+0+', width='+720+', scrollbars='+cScroll+', resizable='+cResize; window.open('./?doc=function/print.php&bo_table=poong&wr_id=34',sWinName,sWinopts); }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위치, 1981년 8월 5일 강원도 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된 준경묘 전경.

지난달 20일 사단법인 전주이씨대동종약원(全州李氏大同宗約院) 공주시분원(公州市分院) 우성면분회(牛城面分會)에서 매년 전주이씨 대종회에서 제향참반(祭享參班)에 종현(宗賢) 남녀 45인이 오전 6시에 우성면 봉현리를 출발하여 삼척시(三陟市) 미로면(未老面) 활기리(活耆里)에 11시경 도착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전세차량 수십여 대 이상 운집 되었다. 개인별 도기(到記)를 필하고 묘소 참반(參班) 길을 재촉하며 울창한 황장목(黃腸木) 의 싱그러운 맑은 공기와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목적지 준경묘 에 도착 제향참반 하고 산세(山勢)를 관찰(觀察) 하였다.

수차(數次) 답산(踏山)했지만 올 때마다 새로운 감회를 느낀다. 미천한 풍수지식 으로 감히 천장지비(天藏地秘) 만대영화(萬代榮華) 대지(大地)를 누가 감히 함부로 평가(評價) 하겠는가?

무엇보다 고산준령(高山峻嶺) 에 천군만마(千軍萬馬) 를 수용 할 수 있는 평탄한 내명당과, 거울같이 맑은 연못 천하를 압도하는 거대한 용세가 대혈 을 증명한다.
 
준경묘(濬慶墓)는 조선태조대왕(朝鮮太祖大王)의 5대조인 양무장군(陽茂將軍)의 묘로, 양무장군(陽茂將軍)은 시조로부터17世, 추존(追尊)목조대왕 (穆祖大王)18세, 추존(追尊)익조대왕(翼祖大王)19세, 추존(追尊) 도조대왕(度祖大王)20세, 추존(追尊) 환조대왕(桓祖大王)21세..양무장군(陽茂將軍)은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5대 조부 시조로부터22世 영경묘(永慶墓)는 양무장군의 부인 이씨의 묘이다.

준경묘(濬慶墓)는 활기리(活耆里) 옛 지명 황기(皇基)에 있고 영경묘는 약 4km 떨어진 하사전리(下賜田里)에 있다.

양무장군(陽茂將軍)께서는 전주에 살다가 아들인 목조대왕(穆祖大王)이 삼척(三陟) 활기리로 옮겨왔고, 1231년 (고려 고종18년) 별세하여 현 강원도(江原道) 삼척시 (三陟市) 미로면(未老面) 활기리 (活耆里) 노동(蘆洞) 신좌을향(辛坐乙向) 준경묘에 모셔져 있다.

영경묘(永慶墓)배위(配位) 이씨도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동산리 묘좌유향(卯坐酉向) 영경묘(永慶墓)에 모셔져있다.

1899년(광무3) 4월 16일 고종황제께서 준경묘(濬慶墓), 영경묘(永慶墓)라고 묘소에 존호(尊號)를 올리고 양쪽에 묘비와 음기(陰記)를 고종황제가 친히 지었다.

왕명으로 묘소를 짓고, 재각(제사를 지내기 전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기 위해 머무는 공간 또는 제사에 필요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공간), 제실 비각 등을 세웠다.

준경묘 앞에는 앞면 3칸 옆면 2칸짜리 제각이 있는데, 지붕선이 옆에서 보았을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단순한 맞배지붕이다.

이 제각은 왕릉(王陵)에 세워지는 정(丁)자 형이 아니라 단순한 일(一)자형으로 되어 있다.

지난 2001년 산림청은 금강송의 우수형질 보존을 위해 준경묘(濬慶墓) 주변 소나무를 여송(女松)으로 선정(選定), 충북 보은 정이품송을 남송(男松)으로 삼아 혼례식을 가졌다.(신부목으로 간택된 금강송의 모습)
이 일대는 울창한 송림 으로 되어 있어 원시림의 경관을 구경할 수 있는 산자수려(山紫水麗)한 곳이다. 이곳의 송림을 황장목(黃腸木) 이라고 하며, 경복궁 중수 때 자재로 쓰였다 한다.

황장목은 겉은 누렇고 속은 붉은빛을 띠는 소나무로 과거 궁궐을 신축하거나 왕족이 죽었을 때 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1890년대까지 국가에서 관리해 왔으나, 이후 관리가 소홀해졌고 1981년에서야 이 일대가 道지방기념물 43호로 지정받기에 이르렀다.

목조(穆祖)께서 한 도승의 예언대로 백우금관(百牛金棺)으로 양친을 안장(安葬)후 5대에 이르러 조선을 창업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활기리에서 앞 재를 넘어 준경묘(濬慶墓)에 이르면 두타산(頭陀山) 줄기에 신좌을향 (辛坐乙向)으로 양무장군(陽茂將軍)의 묘가 모셔져 있는데, 안산을 바라보며 좌로 근산, 우로 대 명산이 있고 뒤로 방위산과 역마산이 있어 5봉으로 둘러싸여 있다.

산세를 보면 우백호(右白虎)는 우뚝하고 좌청룡(左靑龍)이 미약 (微弱) 하므로 전주리씨 후손은 장손(長孫)들이 허약하다는 설도 있다.

조선 개국 160여 년 전에 양무장군께서 이곳에서 돌아가시자 목조대왕(穆祖大王) 께서는 선친의 묘 자리를 찾고 있었다.

마침 나무하러 두타산(頭陀山)으로 올라갔던 집의 일꾼이 나무를 하다 쉬고 있는데, 근처에서 도승과 상좌승이 앉아 산맥을 보며,“저 곳에 묘를 쓰면 5대 후에 임금이 나겠다”는 도승의 말을 듣고, 나무하다 말고 뛰어내려와 주인인 목조대왕께 알렸다.

목조대왕은 급히 달려가 도승 일행을 만나 백방으로 간청하니, 그 도승이 그 자리를 가리켜 주는데, 대신 어려운 조건이 제시되었다.

곧 개토제(開土祭) 때 소 1백 마리를 잡아야 하고, 관(棺)은 금관(金棺)을 써야 효험이 난다는 것이었다. 이에 목조대왕은 고민 끝이 편법을 쓰기로 했다.

곧 처가에 마침 흰 소가 한 마리 있어 백우(百牛)를 백우 (白牛)로 대체하고, 금으로 관을 만들 형편이 못 되니 황금 빛깔의 밀짚(일설에는 귀리짚) 으로 관(棺)을 씌워 금관(金棺)에 대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백우금관설화(百牛金棺說話) 가 탄생한 것이다. 이때 백우(百牛) 를 백우 (白牛) 로 대신하여, 1천년 사직이 반으로 줄어 5백년을 유지했다고도 하고, 준경묘 (濬慶墓) 사방 5봉의 산 수명이 각각 1백년이라 도합 5백년의 조선왕조(朝鮮王朝) 의 수명이 되었다고도 한다.

하여간 이 준경묘(濬慶墓) 자리는 오늘날도 풍수(風水) 를 따지는 사람은 우리나라 제일의 명당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준경묘는 강원도(江原道) 삼척시(三陟市) 미로면(未老面) 활기리(活耆里) 92, 98, 산149, 하사전리(下賜田里) 산 53에 위치하며 1981년 8월 5일 강원도 기념물 제 43호로 지정되었다.

충남 공주출생. 

前 우성새마을금고 7, 8대 이사장. 현 (사)이산전통풍수지리연구회 이사. 전 공주대 평생교육원 풍수지리 강사.


C.P :016-404-1434

智山 이원행

한편, 지난 2001년 산림청은 금강송의 우수형질 보존을 위해 준경묘(濬慶墓) 주변 소나무를 여송(女松)으로 선정(選定), 충북 보은 정이품송을 남송(男松)으로 삼아 혼례식을 가졌으며, `제6회 아름다운 천년의 숲' 대상을 수상하는 등 조선왕조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삼척 미로의 금강송을 부부의 연으로 맺어 주었다. 세계 최초의 소나무 혼레식인 셈이다. 때문에 이들 혼인의례는 기네스북에 오르는 영예를 안았다.
< 공주뉴스=이원행시민 기자/ leeguny98@paran.com> >> 이원행시민 기자 의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