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장-서산대사로부터‘지혜’의참뜻 배우다

2007. 8. 21. 23:56아름다운 글

40장-서산대사로부터‘지혜’의참뜻 배우다
공주대 김덕수 교수의 파워 칼럼
2007-08-20 08:34:29 function sendemail(w,h){ var sWinName = "emailarticle"; var cScroll = 0; var cResize = 0; var cTool = 0; var sWinopts = 'left=' + ((screen.width-w)/2) + ', top=' + ((screen.height-h)/2) + ', width='+w+',height='+h+', scrollbars='+cScroll+', resizable='+cResize; window.open('./?doc=function/mail.php&bo_table=column&wr_id=351',sWinName,sWinopts); } function sendprint(){ var sWinName = "printarticle"; var cScroll = 1; var cResize = 1; var cTool = 1; var sWinopts = 'left='+0+', top='+0+', width='+720+', scrollbars='+cScroll+', resizable='+cResize; window.open('./?doc=function/print.php&bo_table=column&wr_id=351',sWinName,sWinopts); }
요즘 우리가 사는 시대를 지식정보화 사회라고 말한다. 그런데 지식knowledge과 정보information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또 지혜wisdom, 지식, 정보, 자료data간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실제로 학생들이나 강연장에서 만난 분들에게 질문을 하면, 대부분 침묵이나 멋쩍은 웃음으로 일관한다.

이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든가 ‘모를 때는 중간에 서 있는 게 상책이다’라는 한국인 특유의 불량 소프트웨어(어떤 학자는 이것을 ‘중간의식’이라고 정의한다)가 사람들의 적극적인 도전정신에 재를 뿌리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자료, 정보, 지식, 지혜의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자료, 정보, 지식, 지혜의 차이를 설명한다면?

우선 자료란, ‘있는 그대로의 사실fact’을 의미한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겠다.

가령, 등산을 하다가 거대한 암맥巖脈을 발견했다고 하자. 그때 발견한 암맥이 자료인 것이다.

정보는 자료보다는 한 단계 고차원적인 개념으로서 자료 가운데 좀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고급 자료를 의미한다.

암맥을 잘 관찰해보니까 그것은 단순한 바위덩어리가 아니라 바위 표면에 금가루가 많이 붙어있는 금광석金鑛石이었다면, 그 금광석을 정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지식은 정보보다 한 단계 상위개념으로서 정보를 1차 가공하거나 자료를 2차 가공한 결과로 정의될 수 있다.

특히 지식은 고부가가치 창출, 이윤 창출, 환경오염이 없는 쾌적한 생활공간의 확보, 빈부격차나 계층 간 갈등이 대폭 줄어든 국가의 건설과 같은 사회적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자 국부의 원천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위의 사례에서 지식의 개념을 추출해낸다면, 금광석을 제련시켜서 금을 추출해낼 수 있는 기술이나 노하우가 거기에 해당될 것 같다.

지혜는 지식보다도 훨씬 더 고차원적인 개념이다. 지혜는 지식을 초월해서 세상의 운행이치까지 파악함은 물론 그것을 현실에 적용시킬 수 있는 능력까지를 포함하는 광의의 개념이다.

금을 추출한 후, ‘그것을 어떻게 활용해야만 사회적 가치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가?’와 관련된 개념이 지혜다.

즉 금을 가지고 생산할 수 있는 아이템이 반도체, TV, 금목걸이, 금팔찌라고 상정하자.

만약 이때 동일한 양의 금을 투입했을 때 단위당 부가가치가 반도체 부문에서 가장 크게 나타났다면, 그것의 생산에 우선순위를 두고 금을 투입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지혜라고 간주할 수 있다.

지혜가 지식을 압도한다!

지식과 지혜의 미묘한 개념 차이를 재미있게 설명해주는 일화(이것이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재미로 지어낸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또 이 내용은 여러 책에서 소개되고 있기 때문에, 과연 어느 책이 원전인지 제대로 알 수 없다.)가 하나있다. 그것은 임진왜란 때에 승병僧兵을 조직해서 왜적을 격퇴하는데 큰 공을 세우셨던 서산대사(법명은 휴정; 1520~1604)와 사명대사(법명은 유정; 1544~1610)에 관한 얘기다.

하루는 두 스님이 원거리 여행을 떠났다. 두 스님은 한참을 걷다가 풀숲에 앉아서 한가롭게 되새김질을 하고 있는 황소와 검은 소(이것 때문에 오랫동안 많은 고민을 했던 기억이 있다)를 보았다.

심심하던 차에 사명대사가 서산대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사님! 저 두 녀석 가운데 어떤 놈이 먼저 일어날까요?”라고.

그러자 서산대사께서는 “자네가 점괘를 짚어보고 나서 대답을 해보시게”라고 대답했다. 사명대사가 점괘를 짚어보니 ‘불 화火’자가 나왔다.

사명대사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불이 빨간 색이므로 붉은 색 황소가 먼저 일어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서산대사께서는 “아닐세. 내가 보기엔 검은 소가 먼저 일어날 것일세.”라고 대답하는 게 아닌가.

두 스님은 풀밭에 앉아서 소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이윽고 검은 소가 먼저 일어나고 뒤이어 황소가 일어섰다.

그것을 지켜본 사명대사가 서산대사에게 그 연유를 물으니, 서산대사께서는 한마디 말만 던지고 곧장 갈 길을 재촉했다.

“빨간 빛깔의 불이 활활 타오르려면 그 전에 검은 연기부터 일어나는 게 세상의 이치일세. 비근한 예로 솔가지에 불을 붙여보시게.

검은 연기가 빨간 빛깔의 불보다 먼저 일어날 걸세. 그래서 내가 황소보다 검은 소가 먼저 일어날 거라고 말했던 것일세. 잘 아시겠는가?”

한번은 또 이런 일이 있었다. 하루는 두 스님이 길을 가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어느 주막집에 들러서 쉬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주막집 주인이 두 스님을 보자마자 조선 당대의 최고 스님임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는 두 스님을 집안으로 정중하게 모신 다음, 부엌에서 일하는 하녀에게 칼국수를 삶아서 대접할 것을 지시했다.

그런데 그 순간, 주막집 주인의 객기客氣가 발동을 했다. 그는 두 스님에게 “오늘 저녁 식사 메뉴로 제가 무엇을 대접할 것인지 한번 알아맞혀 보십시오.”라고 질문했다.

이번에도 성질 급한 사명대사가 점괘를 짚어보니 ‘뱀 사巳’자가 나왔다. 사명대사는 ‘사巳자’가 가늘고 긴 뱀을 의미하므로 “오늘의 저녁식사는 칼국수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서산대사께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칼국수가 아니라 수제비 모양의 음식이 들어올 것일세”라는 주장을 했다.

서산대사의 얘기를 들은 주막집 주인은 마음속으로 “어째 스승이라는 분이 제자보다도 예측을 못할까?”라고 중얼거리면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부엌에서는 이미 깜짝 놀랄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녀가 국수 반죽을 하다가 그만 물을 너무 많이 붓는 바람에 수제비가 만들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녁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온 주막집 주인은 식사를 대접하면서 서산대사에게 “대사님은 어떤 이유에서 칼국수가 아닌 수제비를 생각하셨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서산대사께서는 “대낮이었으면 칼국수가 나왔겠지만 지금은 밤이지 않는가. 밤에는 뱀이 자신의 몸을 길게 편 상태가 아니라 똬리를 틀고 휴식을 취하기 때문에 그런 모양의 음식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 고민해보니 수제비가 유일하지 뭔가.

그래서 수제비가 나올 거라고 예측한 걸세.” 그 말을 듣고 사명대사와 주막집 주인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위의 일화에서 우리는 점괘를 짚어보는 기술, 즉 지식에 있어서는 두 스님이 거의 비슷한 능력을 가졌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능력에서는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세상의 운행이치를 파악하는 지혜의 측면에서는 서산대사가 사명대사보다 한 수 위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지식보다 지혜가 더 소중하고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여러 분야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교양과 지식을 쌓는 것도 결국은 세상살이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지혜를 얻기 위함이다.

검은 소의 실체를 찾아 오랫동안 헤매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나는 검은 소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던 기억이 있다. 임진왜란 때에 우리나라에 검은 소가 있었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혹시 두 스님께서 젖소를 검은 소라고 칭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젖소에 관한 각종 자료를 검색해 보았다.

젖소가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것은 1902년의 일이다. 구한말 당시 농상공부 기사로 근무하던 프랑스인 쇼트가 젖소를 들여와 목장을 시작한 것이 우리나라 낙농의 시초였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검은 소를 젖소로 간주하는 것은 큰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정지용 선생이 쓴 ‘향수’라는 시詩도 한동안 나를 괴롭혔던 테마다. 그 시에 나오는 ‘~얼룩 배기 황소~’라는 글귀가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얼룩 배기를 황소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과연 정지용 선생이 ‘향수’를 직접 지으신 걸까, 아니면 외국 사람의 시를 번안飜案한 것일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이어졌지만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내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여러 교수님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어느 누구도 속 시원한 답변을 해주지 않았다.

게다가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는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 엄마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라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거기에는 얼룩소를 젖소로 표현하고 있었다.

나는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혼란스럽기만 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댄 것은 우리 공주대학교의 학생들이었다. 하루는 교양 선택과목인 ‘기술과 사회’시간에 소에 얽힌 내 고민을 들려주면서 “누군가 그것을 명쾌하게 해결해주는 학생이 있다면, 그 학생에게 성적을 한 등급 올려주겠다. 단, 맨 처음으로 나에게 그 비밀을 밝혀준 학생에 한해서다”라고 못을 박았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 30분도 채 지나가기 전에, 공과대학 3학년 학생이 관련 자료를 들고 헐레벌떡 내 연구실로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검은 소에 대한 사진까지 들려있었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교수님, 그 검은 소 있잖아요. 우리나라의 전통 황소가 맞습니다.

제가 스캔 받아가지고 온 사진을 한번 보세요. 소 옆구리에 검은 무늬가 여기저기 들어가 있지요. 이 검은 소가 바로 강원도 횡성지방에서 사육되었던 ‘칡 소’라고 합니다.

지금은 멸종되었다고 하고요, 요즘 복원사업이 한창 이루어지고 있답니다. 참고하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나는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게는 그 학생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근 7~8년 동안 내가 풀지 못하고 끙끙거렸던 난제難題를 그 학생이 말끔하게 해결해주었기 때문이다.

지식정보화 사회는 이렇게 교수도 모르는 것을 학생들이 쉽게 해결해 줄 수 있는 사회이다.

따라서 교수라고 해서 아랫사람인 학생들에게 함부로 대하거나 권위주의적인 고자세로 그들을 무시하면 안 된다.

만약에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숨기려하지 말고 오히려 불치하문不恥下問의 열린 자세로 아랫사람들로부터 배우려는 긍정적인 자세를 가질 때, 지혜의 샘물을 길어오를 수 있다.

나는 그 학생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풀지 못했던 여러 개의 수수께끼를 동시에 해결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즉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일화에 등장한 검은 소는 젖소가 아니라 칡 소였다는 사실, 정지용 선생의 ‘향수’에 나오는 ~얼룩 배기 황소~ 또한 잘못된 표현이 아니라는 점,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 나오는 얼룩송아지는 젖소가 아니라 우리의 전통 한우인 칡 소의 송아지라는 사실을 말이다.

지혜를 얻으려면 적극적인 도전자세가 필요하다!

지혜는 지식정보화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핵심 키워드로서 많이 쌓으면 쌓을수록 좋은 개념이다.

그런데 지혜는 저절로 쌓여지지 않는다. 일단은 주위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의구심을 품어보는 적극적인 도전자세가 필요하다.

왜 그럴까?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과연 저 얘기가 맞기는 맞는 얘기인가? 그것에 대해 제대로 검증해 본 적이 있는가? 등등.

지혜를 쌓는 또 다른 지름길은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경륜을 쌓아가며 동시에 독서, 명상, 사색과 같은 정신적인 수양을 통해 남과 내가 다르고 우리 사회가 매우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냉철하게 인식하는 일이다.

외골수적이고, 폐쇄적인 사람에게 지혜는 다가오지 않는다. 지혜의 친구는 따뜻한 심성과 냉철한 두뇌,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타인이 지닌 다양성과 개성을 기꺼이 인정해주는 배려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지혜와 가깝게 지내려면 무엇보다도 마음의 벽을 허물고 어느 누구와도 기꺼이 친구할 수 있는 개방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는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병을 고치려면 자신의 병을 내면에다 감추지 말고 자꾸 밖으로 들춰내서 주위 분들의 조언과 도움을 받는 게 훨씬 더 유리한 것과 똑같은 이치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지혜와 친구해서 인생의 깊이가 깊어지고 삶의 가치가 한 차원 업그레이드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김덕수 교수
충북대학교 경제학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석박사과정을 이수하고 1995년도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동안 한국증권거래소 조사부, 고려대학교 강사, KAIST 경제분석연구실 선임연구원, 일본 과학기술정책연구소 객원연구원,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위원, 중등임용고사 출제위원, 국무총리실 소속 산업기술연구회 정부출연구소 기관평가위원, 자유민주연합 혁신위원회 위원장, 대구교통방송 경제해설위원, 공주대학교 기획연구부처장을 역임했다.

현재 공주대학교 교수회장 겸 사범대학 일반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생각을 달리하면 희망이 보인다>, <김덕수 교수의 통쾌한 경제학>, <김덕수 교수의 경제 IQ높이기>, <김덕수 교수의 경제 EQ높이기>, <맨주먹의 CEO 이순신에게 배워라>, <한국형 리더와 리더십>,  <게임의 지배법칙으로 자기를 경영하라> 등 다수가 있다
< 공주뉴스=김덕수시민 기자/ news@gongjunews.net> >> 김덕수시민 기자 의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