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장-짧은 만남과 긴 인연

2007. 7. 26. 15:25아름다운 글

36장-짧은 만남과 긴 인연
공주대 김덕수 교수의 파워 칼럼
2007-07-25 09:48:35 function sendemail(w,h){ var sWinName = "emailarticle"; var cScroll = 0; var cResize = 0; var cTool = 0; var sWinopts = 'left=' + ((screen.width-w)/2) + ', top=' + ((screen.height-h)/2) + ', width='+w+',height='+h+', scrollbars='+cScroll+', resizable='+cResize; window.open('./?doc=function/mail.php&bo_table=column&wr_id=288',sWinName,sWinopts); } function sendprint(){ var sWinName = "printarticle"; var cScroll = 1; var cResize = 1; var cTool = 1; var sWinopts = 'left='+0+', top='+0+', width='+720+', scrollbars='+cScroll+', resizable='+cResize; window.open('./?doc=function/print.php&bo_table=column&wr_id=288',sWinName,sWinopts); }
“사람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곧 여러 가지 연緣을 맺어가는 고행의 과정이다.”라고 설파한 어느 노老스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날 수 없거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회귀할 수 없는 인연은 인간에게 애틋한 아쉬움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상처를 주었던 악연惡緣은 반추反芻와 망각이라는 자정작용을 통해 용서와 화해라는 아름다움을 제공해 주는 것이 우리네 인생살이의 이치다.

여기서 나는 오랫동안 내 가슴 속에 고이 묻어 두었던 ‘짧은 만남과 긴 인연’ 하나를 소개해 볼까 한다.

그 인연은 부족하나마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원동력이었기에 나는 지금도 그것을 애지중지하고 있다.

시간은 2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9년 3월 5일, 나는 충북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제1회로 입학한 우리들을 맞이한 것은 학사 출신의 전임교수 한분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네 분의 시간강사였다.

그 당시는 국내 대학들이 양적인 팽창을 시도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석사학위만 있어도 줄만 잘 서면 대학교수가 될 수 있던 재미난(?) 시기였다.

당연히 그분들이 전개하는 강의의 질과 내용은 기대 이하였다. ‘저 정도면 나도 대학교수가 될 수 있겠다.’는 불만이 있었지만, 그것을 표출할 만큼의 용기는 없었다.

다만, 나는 다른 방법으로 교수와 시간강사에 대한 불만을 해소시켜 나갔고, 그것이 결국 대학원 진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사람들...

나는 충북대의 교수나 시간강사들과 대화하기보다는 경제학 명저를 지은 유명 교수님(서울대 정운찬 교수님, 연세대 정창영 교수님, 한양대 안석교 교수님, 서강대 이효구 교수님, 부산대 박홍립 교수님)들과 서신교환을 하면서 내 스스로 경제학의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그분들 가운데 정운찬 교수님과 정창영 교수님은 각각 서울대와 연세대 총장이 되셔서 대학경영의 CEO로 많은 업적을 남기셨다.

처음에 내 대학동기들은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들한테 사기詐欺를 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름만대도 다 알만한 유명 교수님들이 직접 사인한 경제학 책과 편지까지 내게 보내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은 나의 기발한 공부법에 대해 인정해주었다.

그들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야, 그렇게 유명한 교수들을 어떻게 꼬드겼냐?”라며 의아해했지만, 그 방법은 매우 단순했다.

즉 그분들이 저술한 경제학 책을 최소한 10번 정도 정독한 후, 그 책에 내재되어 있는 오자, 탈자, 내용상의 오류를 깨끗하게 정리해서 해당 교수님께 보내드린 게 전부였다.

그러면 교수님들이 “무척 고맙다.”, “자네의 열정과 순수성에 감동했다.”, “우리 학교 대학원에 진학해라. 그러면 내가 자네 뒤를 후원해 주겠다”라는 편지와 함께 자신이 저술한 다른 책까지 덤으로 보내주셨다.

또 나는 공부하다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편지로 교수님들께 질문했고, 그분들은 친절한 설명으로 나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었다.

요즘 같으면 이-메일로 손쉽게 주고받았겠지만, 1980년대 초만 해도 그렇지 못했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지금도 여러 교수님들과 주고받았던 수많은 편지와 그분들이 사인해서 보내준 빛바랜 경제학 책들을 가보家寶로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이름 없는 지방대 학생을 학문의 길로 안내해준 여러 교수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고 서상철 교수님과의 만남과 서글픈 이별

나는 여러 교수님들과 학문적인 접촉을 계속하면서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다. 대학원은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중에서 제2외국어 시험을 치르지 않는 고려대로 결정했다.

그리고 1982년 5월 초, 입시정보를 얻을 목적으로 고려대 교수님들을 만나보기 위해서 무작정 상경했다.

그 당시 고려대 경제학과와 교수 연구실은 현재의 시계탑 건물인 서관西館에 위치해 있었고, 나는 책을 통해서 이름이 낯익은 H, K, L, G 교수님의 연구실 문을 노크하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그분들에게 “저는 충북대 경제학과 졸업반 학생입니다. 대학원에 진학해서 경제학 공부를 해보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는지, 공부방법과 시험문제 유형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그분들은 나의 황당무계한 방문에 어이없어 하시면서 “내 책이나 열심히 읽어라”는 퉁명스런 어투의 말씀과 “빨리 연구실을 나가달라”는 반응을 보이셨다. 내가 아는 교수님들과는 너무 다른 반응이어서 불쾌했다.

기분이 상한 상태로 서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데 ‘고려대학교 경제연구소’라는 팻말이 보였다. 순간 내 뇌리에 “저기에 가면 대학원생이 분명히 있을 거야. 그 사람에게 입시관련정보를 부탁해 보자”는 생각이 떠올라 무조건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

그런데 경제연구소 안에는 내가 기대했던 대학원생 대신에 중후한 모습의 안경 낀 교수님께서 뭔가를 열심히 하시다가 나를 향해 뒤돌아보시고는 “어쩐 일로 왔지?”라고 물으셨다.

나는 앞서 다른 교수님께 여쭤 보았던 말씀을 그대로 드렸더니, 교수님께서는 소파에 앉기부터 권하셨다.

그리고 어디론가 전화를 거셨다. 잠시 후 조교로 보이는 대학원생이 나타났고, 교수님은 그에게 “이 친구가 충북대 경제학과 졸업반인데 우리 대학원에 오고 싶은 모양이야. 자네가 과거 대학원 입시문제로 출제되었던 사항들을 정리해서 전해주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나에게 “열심히 공부해서 우리 대학원에 꼭 합격하기 바래요.”라며 격려해 주셨다.

나는 고개를 깊이 숙여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경제연구소 문을 나와서 교수님의 명패를 보니 ‘경제연구소장 서상철徐相喆’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그렇게 해서 얻은 정보와 자료를 바탕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2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무난히 합격했다.

나는 서 교수님을 지도교수로 모셔야겠다는 생각했다. 그러나 1984년 3월 5일, 막상 대학원에 입학하고 보니 서 교수님께서는 고려대를 떠나 건설부 차관이라는 공직公職을 맡고 계셨다.

하루는 차관실로 전화를 걸어 “교수님! 저는 1년 전에 교수님을 찾아뵙고 대학원 입시자료를 얻어갔던 충북대 출신의 ○○○입니다. 이번에 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을 지도교수로 모시고 싶은데, 교수님이 학교에 안 계셔서...”라고 말씀드리자 서 교수님께서는 웃음 띤 목소리로 “축하하네. 이제부터 공부다운 공부를 해보게.

내가 곧 대학으로 돌아갈 거 같으니까, 우선은 나하고 친한 N교수를 잠시 동안 지도교수로 모시고 있게. 나중에 내가 자네의 지도교수를 맡아줌세”라며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

그런데 이 말씀을 끝으로 나는 서 교수님의 따뜻한 음성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었고, 미소 띤 모습도 뵐 수 없게 되었다.

서 교수님과 전화통화를 나누고 나서 몇 개월 뒤에, 교수님께서는 동력자원부 장관으로 승진을 하셨다.

그리고 버마(현 미얀마)를 순방하던 전두환 전 대통령을 수행하시다가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자행된 ‘아웅산 테러사건’으로 순국殉國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서 교수님에 대해 각별한 생각을 갖게 된 것은 그분이 돌아가신 후, N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나서부터다.

하루는 N교수님께서 나를 부르더니, “자네, 서 교수님하고는 어떤 관계야?”라고 물으셨다. 영문을 모르는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N교수님은 “그런데 서 교수님은 왜 자네에 대한 부탁을 내게 하셨을까?”라고 중얼거리시며, 교수님께서 부탁하셨다는 사항에 대해서 하나하나 말씀해 주셨다.

“김 군의 가정환경은 어떤지 물어보고, 입학성적을 체크해 주세요. 그리고 경제연구소 조교자리를 알아봐 주고, N교수께서 당분간 김 군의 지도교수를 맡아 주세요”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N교수님은 나의 신상자료와 입시성적을 서 교수님께 보고했고, 당시 고려대 경제학과 출신들도 얻기 힘든 조교자리까지 마련하느라고 고생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연신 고개를 꺄우뚱거리셨다. 한마디로 나에 대한 서 교수님의 지나친(?) 배려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서 교수님을 만난 것은 딱 한번뿐인데, 교수님께서는 뭘 믿고 내게 그런 후의厚意를 베푸신 것일까?”

내가 훗날 하늘나라에서 서 교수님을 뵙게 되면 꼭 그 질문을 드려볼 생각이다. N교수님으로부터 그런 얘기를 들은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는 서 교수님의 기일忌日만 되면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찾는다.

그곳에서 영면하고 계신 서 교수님의 영혼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며, 과거 부족한 나를 따뜻하게 챙겨주셨던 점에 대해 감사인사를 드린다.

그리고 나도 교수님처럼 힘없고 가난한 제자들에게 더없이 따뜻한 교육자가 될 것을 굳게 약속하고 되돌아온다.

고 서상철 교수님을 흉내라도 낼 수 있다면...

나는 가난한 농부(?)의 집안에서 자라났다. 원래는 집안이 부자였지만, 아버지의 잘못된 빚보증과 연이은 사업실패로 가난을 가슴에 달고 살았다.

그래서 어릴 적 꿈은 돈 없이 공부할 수 있는 육군사관학교(이하 육사)에 진학해서 대학졸업증을 따고 장군이 되는 것이었다.

또 평생을 군문軍門에서 일하다가 국립현충원에 묻히고 싶었다. 육사에 가면 많은 제약 속에서 생도생활을 해야 하기에, 나는 고교시절을 자유롭게 보내고 싶었다.

영화도 보고 싶었고, 보충수업 대신 체육관에 나가 격투기를 배우고도 싶었고, 머리도 남들보다 약간 길게 길러보고 싶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분은 오로지 학업성적이 전부였다. 더욱이 화가 났던 것은 가정형편을 보아가면서 제자를 대하는 태도였다.

그분은 제자들을 신의 아들(예: 경찰서장, 교육감, 사장 아들 등), 장군의 아들(교장, 교감의 아들), 어둠의 자식(공부는 꽤 하지만 집안이 가난한 아이)들, 짐승새끼(공부도 못하고, 집안도 가난한 아이)로 분류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분에게 짐승새끼에 불과했다. 한번은 촌사람으로 변한 내 아버지가 담임선생님을 찾아뵙고 간 모양인데, 수업시간에 내 아버지를 폄훼하는 말씀을 하셨다.

또 육사 진학에 실패한 후, 충북대 경제학과에 원서를 써달라고 하니까 그분께서는 내게 충격적인 모욕을 주셨다.

“흥, 네 녀석이 성공하면 내 열손가락에 장을 지지겠다.”라고 말이다. 지금도 그 말은 내 가슴 속에 비수匕首로 박혀 있다.

고교 시절 나는 세분의 담임선생님을 만났지만, 제자를 대하는 그분들의 태도는 대등소이 했다. 지금도 내가 할 수만 있다면, 내 인생에서 고교 시절의 추억만큼은 말끔하게 지워버리고 싶다.

고교 시절에 겪었던 마음의 깊은 상처와 육사 진학 실패가 가져다 준 심리적 충격을 말끔하게 치유해 준 분 들이 다름 아닌 정운찬, 정창영, 안석교, 이효구, 박홍립 교수님들이다.

그리고 나를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만들어주신 분은 고故 서상철 교수님이다. 이렇게 따뜻한 은사님들의 배려와 격려가 있었기에, 자칫 나쁜 길로 빠질 수도 있었던 내가 오뚝이 정신으로 일어서서 오늘까지 오지 않았나 싶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열정과 도전정신으로 온갖 역경과 시련을 극복하면서 스스로를 담금질 할 수 있도록 채근해준 여러 교수님들께 나는 큰 빚을 지고 있다.

특히 과거 나의 돈키호테적 행동을 ‘젊은이의 패기와 도전자세’로 너그럽게 보아주시고 남모르게 후원을 아끼지 않으셨던 고故 서상철 교수님을 자주 회고하며 나의 영원한 사표師表로 가슴에 새겨 놓고 있다.

이제 내 유일한 꿈은 고故 서상철 교수님을 흉내라도 내보는 것이다. 그렇게만 살아갈 수 있다면, 적어도 나는 정년퇴임 때 “그래도 나는 성공한 사람이었다”라는 회고사 한 줄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도 많은 반성과 노력을 하면서 살아야겠지만, 내 마음 속의 서 교수님께서는 오늘도 나를 향해 빙그레 웃으신다. “자네, 쉬지 말고 부지런히 연구하시게. 그게 남는 장사일세”라고 말씀하시면서.




    김덕수 교수
충북대학교 경제학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석박사과정을 이수하고 1995년도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동안 한국증권거래소 조사부, 고려대학교 강사, KAIST 경제분석연구실 선임연구원, 일본 과학기술정책연구소 객원연구원,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위원, 중등임용고사 출제위원, 국무총리실 소속 산업기술연구회 정부출연구소 기관평가위원, 자유민주연합 혁신위원회 위원장, 대구교통방송 경제해설위원, 공주대학교 기획연구부처장을 역임했다.

현재 공주대학교 교수회장 겸 사범대학 일반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생각을 달리하면 희망이 보인다>, <김덕수 교수의 통쾌한 경제학>, <김덕수 교수의 경제 IQ높이기>, <김덕수 교수의 경제 EQ높이기>, <맨주먹의 CEO 이순신에게 배워라>, <한국형 리더와 리더십>,  <게임의 지배법칙으로 자기를 경영하라> 등 다수가 있다
< 공주뉴스=김덕수시민 기자/ news@gongjunews.net> >> 김덕수시민 기자 의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