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본가의 처마 밑에 살고 있던 거미와 팔순 노인인 내 어머니의 전쟁은 언제나 거미의 한판 승리로 끝났다.
노안老眼으로 눈이 어두운 어머니는 새로 나온 10원짜리 동전 크기의 거미를 찾아내서 죽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미란 녀석은 좌절과 포기를 모른다. 어머니가 긴 빗자루를 이용해서 처마 밑의 거미줄을 걷어내면, 그 녀석은 처마 끝으로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가 그 다음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거미줄을 다시 친다.
그와 같은 거미의 행동은 자기 뇌 속에 내장된 ‘거미집 짓기’라는 프로그램의 자동화 실행에 따라 본능적으로 거미줄을 치겠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나에게는 마치 거미가 도전정신의 화신으로 느껴진다.
만약 사람들도 처마 밑의 거미처럼 세상의 온갖 시련과 고통에 초연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런 것들 때문에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살맛나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성공을 거두는 일보다 실패하는 일이 훨씬 더 많다. 또 나이가 들수록 다리 힘만 빠지는 게 아니다. 패기와 도전정신도 함께 수그러들게 마련이다.
그것은 곧 세상살이를 통해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경험하다보니 될성부른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예견할 수 있는 동물적인 감각이 저절로 길러졌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나이를 먹을수록 올라가지 못할 나무에 올라갈 확률은 낮아지게 된다.
빈대한테서 삶의 철학을 얻은 부유한 노동자!
그런데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나이가 들어서도 젊은이들 못지않은 도전정신과 청년정신으로 평생을 살다간 분들이 적지 않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현대HYUnDAI'라는 브랜드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일궈냈던 고故 정주영 회장(이하 정 회장)이다.
그런데 정 회장은 생전에 “나의 도전정신은 빈대에게서 배운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그의 자서전인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 나오는 빈대 얘기를 잠깐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중략)... 네 번째 가출로 인천부두에서 막노동을 할 때, 그곳의 노동자 합숙소는 그야말로 빈대지옥이었다. 떠메고 가도 모를 만큼 고단한 지경에도 잠을 잘 수 없게 빈대가 극성이었다.
하루는 다 같이 꾀를 써서 밥상위로 올라가 자기 시작했는데, 잠시잠깐 뜸한가 싶더니 이내 밥상 다리로 기어 올라와 물어뜯었다.
다시 머리를 써서 밥상다리 네 개를 물 담은 양재기 넷에 하나씩 담가놓고 잤다. 빈대가 밥상 다리를 타려하다가 양재기 물에 익사하게 하자는 묘안이었다.
쾌재를 부르면서 편안히 잔 것이 하루나 이틀쯤 되었을까? 다시 물어뜯기기 시작했다. 불을 켜고 도대체 빈대들이 무슨 방법으로 양재기 물을 피해 올라 왔는가를 살펴보았더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빈대들은 네 벽을 타고 천정으로 올라온 다음, 사람을 목표로 뚝 떨어져 목적달성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빈대도 물이 담긴 양재기라는 장애를 뛰어넘으려 그토록 전심전력으로 연구하고 필사적으로 노력해서 제 뜻을 이루는데 나는 사람이 아닌가. ...(중략)...
- 정주영 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제삼기획, 1991, p.67에서 인용 -
빈대한테서 교훈을 얻은 정 회장은 부하직원들에게 이런 말을 즐겨했다. “사람들은 곤경에 처하면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하다가 쉽게 체념해 버린다. 그러고는 탈출구가 없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곤경에서 빠져나오려는 노력을 포기했기 때문에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또 그는 “남의 성공은 행운 탓으로 돌리고 자기의 실패는 불운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세상을 살다보면, 순탄하게 일이 잘 풀리는 경우도 있고 힘겹게 뚫고 나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어느 때는 운 비슷한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운이 뭐 별건가. 운은 ‘때’를 의미한다. 타고난 ‘때’에 따라 사람의 일생이 결정되어진다는 것은 정말로 우스운 얘기다.
사주가 우리의 팔자를 결정짓는 게 아니라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때’에 어떻게 대처하고 노력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승패勝敗가 판가름 난다”라는 말로 자신의 인생관을 피력하기도 했다.
또 정 회장은 계열사의 CEO들에게 “나는 지금도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면 지칠 줄 모르는 빈대의 노력을 되새겨본다.
대단치도 않은 시련과 고통 앞에서 쉽게 좌절하고 포기하는 사람을 보면, ‘빈대만도 못한 사람’이라고 비판하고 싶은 충동에 빠진다”라고 고백한 적도 있다.
“장애란 뛰어 넘으라고 있는 것이지, 걸려 엎어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실패라고 생각하는 한, 그것은 실패가 아니다”, “최선의 노력을 쏟아 부으면 성공하지 못할 일도 없다”라는 정 회장의 철학도 빈대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청개구리를 함부로 욕하지 마라!
정 회장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라는 책(p.57)에서 초등학교 시절에 배웠던 ‘청개구리의 교훈’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했다.
...(중략)... 청개구리 한 마리가 버드나무 가지에 올라가고 싶어 몸을 날려 뛰었으나 버드나무 가지가 너무 높아 닿지도 못하고 실패했다.
그러나 청개구리는 낙심하지 않고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 계속 뛰어오르기를 시도해서 결국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보통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청개구리의 교훈’이었다. 개구리도 성공하는데, 나는 사람의 자식이었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정 회장의 얘기가 화투 비광에 숨겨진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오늘날 일본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오노의 전설’이란 제목으로 소개되고 있는 청개구리 얘기가 정 회장의 초등학교 시절에 ‘청개구리의 교훈’으로 읽혀졌다는 것이 놀랍기 그지없다.
화투는 분명 포르투갈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후, 다시 우리나라로 수입된 것이다. 그런데 어찌해서 비광의 핵심내용인 ‘오노의 전설’이 일본보다 60~70년 앞서서 조선의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청개구리의 교훈’으로 소개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혹시 제국주의 시대의 일본 교과서에서 ‘청개구리의 교훈’으로 다뤄졌던 것이 조선 교과서에 그대로 소개되었고, 그것이 현대에 이르러 일본 초등학교 교과서에 ‘오노의 전설’로 각색된 것은 아닐까 싶다.
정 회장은 비광 속에 등장하는 청개구리에 대해서도 빈대 못지않은 칭찬을 해주고 있다.
비광을 보면 능수버들(원래는 녹색인데, 일본의 화투 제작자가 그것을 검은색으로 잘못 처리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화투 제작자는 그것이 뭔지도 모르고 그대로 베끼는 실수를 저질렀다), 선비 한사람, 청개구리 1마리가 등장한다.
나는 처음에 비광 화투를 보고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추운 겨울인 12월을 상징하는 화투 비광에, 여름 양산을 쓴 선비와 땅속에서 겨울잠을 자고 있어야 할 청개구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궁금증을 갖고 화투에 나오는 각종 동식물과 문양의 등장배경 및 의미에 대해 연구를 시도했고, 그 결과 화투 48장에 감추어진 문화적 비밀을 밝혀낼 수 있었다.
물론 화투에 대한 최초의 연구는 내가 아니라 다른 분에 의해서 시도되었다. 동덕여대에서 일본어와 일본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이덕봉 교수님이 문화기호학적인 측면에서 일본 화투를 최초로 분석했다.
나는 그분이 연구한 결과에다 몇 가지 새로운 사항을 추가적으로 밝혀내고, 화투에 대한 종합적인 정리를 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투에 대한 사회적 이슈가 제기될 때마다 언론사의 기자들이나 TV 방송의 제작자들은 나를 제일 먼저 찾아준다. 그 점에 대해서는 이덕봉 교수님께 송구스럽고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한편, 청개구리를 도전정신의 화신으로 소개하는 ‘오노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 본명이 오노노도후小野道風인 오노는 일본의 귀족으로서 약 10세기경에 활약했던 당대 최고의 서예가였다.
그런데 젊은 시절의 오노가 붓글씨 공부를 하다 싫증이 났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방랑길을 떠나게 되었다.
하긴 한창 젊었을 때, 공부를 좋아하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다. 화투 비광에 나오는 양산 쓴 선비가 바로 방랑길을 떠나는 오노의 모습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오노가 능수버들 가에 도착했을 때, 그는 아주 신기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것은 청개구리 한 마리가 능수버들 잎에 기어오르기 위해서 안간 힘을 쓰는 모습이었다. 청개구리는 능수버들 잎을 향해 점프를 시도했지만, 자기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오르다가 미끄러지고 또 오르다가 미끄러지기를 반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개구리는 계속해서 점프를 시도하는 것이었다. 오노는 지칠줄 모르고 도전하는 청개구리의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미물인 청개구리도 저렇게 좌절을 모르고 노력하는데, 인간인 내가 여기서 포기하면 되겠는가?”라는 깨달음을 얻은 후, 곧장 집으로 되돌아갔다. 그런 다음, 붓글씨 공부에 매진해서 일본이 자랑하는 최고의 서예가로 대성했다.
모기의 도전정신과 집중력을 배우자!
정 회장이 빈대와 청개구리로부터 삶의 철학을 배웠다면, 나는 모기한테서 도전정신과 집중력을 벤치마킹한 사람이다.
다른 곤충들의 삶과 비슷하게 모기 또한 ‘알 ⇒ 유충 ⇒ 성충 ⇒ 모기’로 변신하는 프로세스를 밟는다.
그런데 이 과정 중에 어느 한군데에서 제대로 된 변신이 일어나지 않으면, 모기의 운명은 그것으로 끝이다. 따라서 모기는 서바이벌을 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벗어야 하는 환골탈태換骨奪胎를 시도한다.
그것이 모기 세계의 섭리이자 생리다. 또 모기는 인간이나 동물을 이길만한 육체적인 힘을 갖고 있진 않지만, 야음夜陰을 틈타서 그들의 피를 느긋하게 빨아먹을 수 있는 고도의 집중력과 도전정신을 갖고 있다.
모기는 그 특유의 집중력으로 주위의 여러 가지 방해 요인들을 극복하고, 인간이나 동물의 땀 냄새를 비롯한 체취, 체온, 빛 등에 집중해서 그들의 존재를 찾아내고 소리 소문 없이 접근해서 흡혈을 시도한다.
그것 또한 모기의 생존을 위한 절대조건이다. 게다가 1,000미터에서도 인간이나 동물의 존재를 감지하고 그들을 향해 날아갈 수 있다고 하니, 그 능력은 칭찬을 해주고도 남을만하다.
흡혈을 하다 발각되면 인간의 육중한 손바닥이나 동물들의 꼬리털에 의해 가혹하게 죽임을 당할 수 있지만, 모기는 그것에 개의치 않고 흡혈을 시도한다.
작은 미물인 모기가 보여주는 끝없는 도전정신은 히말라야 정상을 밟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산악인들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김덕수 교수 |
충북대학교 경제학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석박사과정을 이수하고 1995년도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동안 한국증권거래소 조사부, 고려대학교 강사, KAIST 경제분석연구실 선임연구원, 일본 과학기술정책연구소 객원연구원,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위원, 중등임용고사 출제위원, 국무총리실 소속 산업기술연구회 정부출연구소 기관평가위원, 자유민주연합 혁신위원회 위원장, 대구교통방송 경제해설위원, 공주대학교 기획연구부처장을 역임했다.
현재 공주대학교 교수회장 겸 사범대학 일반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생각을 달리하면 희망이 보인다>, <김덕수 교수의 통쾌한 경제학>, <김덕수 교수의 경제 IQ높이기>, <김덕수 교수의 경제 EQ높이기>, <맨주먹의 CEO 이순신에게 배워라>, <한국형 리더와 리더십>, <게임의 지배법칙으로 자기를 경영하라> 등 다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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