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생들에게 과목 선택의 기회를 보장한 것은 제7차 교육과정 때부터다. 고교생들의 학습 부담을 덜어준다는 명분에서 시작된 과목 선택제는 학생들의 교양수준을 저하시켰을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공부하기 힘든 과목은 기피하고 쉬운 과목만을 집중적으로 선택하게 하는 문제가 있다.
일례로 수학과목을 공부하지 않고도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나라는 아마도 한국이 유일할 것이다.
그런데 수리적 기초가 전혀 없는 아이가 대학에 진학해서 교수의 강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고도 교육인적자원부는 날마다 교육개혁, 교육혁신만을 부르짖고 있으니, 저들이 과연 제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인가?
나는 무능하고, 오만한 교육인적자원부를 깨끗하게 구조조정 하는 것이 우리나라 교육혁신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우리가 그렇게도 베껴대는 일본의 경우도 우리의 교육인적자원부와 같은 문부성을 과학기술청과 통합시킨 지 이미 오래되었다.
어쨌든 교육과정이 제6차에서 제7차로 바뀌면서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출제시스템도 크게 바뀌었다.
우선 서울대 출신 마피아들의 횡포와 그에 따른 폐단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지적되자,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출제교수의 선정 룰을 대폭 변경했다.
즉 전체 출제위원 중에서 서울대 출신 교수들이 차지하는 비율을 30% 이내로 줄이는 동시에 그동안 4년제 대학교수들의 전유물이었던 출제위원직을 일선 교사들에게도 개방하는 내부혁신을 단행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그러한 혁신조치에 매우 환영한다. 또 출제문항 수, 출제 양식, 최종문항의 선정방식 등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세부 선택과목(예: 경제)의 문항 수가 제6차 교육과정에서는 10문항이었는데 제7차 교육과정에 들어와서는 20문항으로 늘어났다.
당연히 과목별 출제위원 수도 종래의 3명에서 5명(기획위원 1인, 출제위원 4인)으로 크게 늘어났다. 최종문항의 선정방식도 제6차 교육과정 때보다는 한결 부드러워졌고 출제위원들의 참여범위도 크게 줄었다.
즉 제6차 교육과정 때에는 사회탐구의 세부과목별 출제위원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최종문항을 선택했다.
그러나 제7차 교육과정에서는 사회탐구영역을 소규모 그룹(예: 일반사회, 정치, 사회문화)으로 나눈 후, 그들이 중심이 되어 최종문항을 선정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물론 수리탐구, 과학탐구, 기타 사회탐구에서 각각 1~2명씩의 출제위원을 참석시킴으로써 다른 시각과 입장에서 오답시비나 복수정답의 발생가능성을 모니터링 할 수 있도록 했다.
그것 또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출제시스템이 크게 개선된 측면이며 우리는 그들의 숨은 노고에 대해서도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7차 교육과정의 출제시스템에는 우리들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문제점들이 잉태되고 있었다.
이것은 출제시스템의 문제라기보다는 시스템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심성이나 태도에 때문에 발생하는 한계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뿜는 독소는 학생들의 창의적인 교육과 시험문항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변별력까지 송두리째 파괴시키고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초보 출제위원의 문제가 상상외로 심각했다!
서울대 출신 마피아들의 출제위원 비율을 30% 이내로 하향 조정시키면서 나타난 가장 큰 문제는 참신하고 유능한 출제위원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제6차 교육과정 때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각 영역별 출제위원장만 선정하면, 그 사람이 알아서 자신의 선·후배를 중심으로 세부전공별 책임자(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이를 기획위원이라고 칭한다)를 추천하고, 그들이 다시 자기 과목의 출제위원들을 섭외해서 최종 선정하는 과정을 밟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 방식은 ‘끼리끼리의 횡포’라는 한계는 있었지만, 서울대 출신 마피아들끼리 사전에 출제능력을 검증받은 우수한 교수들만 위촉하기 때문에 출제위원의 자질문제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7차 교육과정 때부터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독자적인 ‘출제위원 인력 풀’을 구축하고 그에 기초해서 출제위원을 선정했다.
그러다보니 출제능력이 결여된 인물을 출제위원으로 잘못 선정하는 사례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상상외로 심각했음을 고백한다.
그와 관련해서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기억이 하나 있다. 초보 출제위원으로서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W교수에 얽힌 비화다.
W교수는 귀족 집안의 출신으로 서울대 경제학과와 미국의 최고 명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서울에 있는 E대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어느 날 그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출제위원으로 활동하고 싶다는 욕심에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출제위원 인력 풀’에다 자기이름을 올려놓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로또복권의 추첨방식과 같은 투명한 선정절차를 통해 그를 출제위원으로 선정했는데, 문제는 그가 시험문항을 제대로 개발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아무리 초보 출제위원이라고 하지만 적어도 국내외의 명문대학을 졸업한 교수라면 기본적인 자세와 능력을 갖고 있을 만도 한데 그는 내 기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단 대학수학능력시험의 문항형식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고, 시험문항을 고도高度로 구조화시키는 능력 또한 제로 상태였다.
게다가 한국말 표현이 너무 서툴러서 그가 출제한 문제는 손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결국 W교수는 32일 동안 제대로 된 문항을 1문제도 출제하지 못한 채, 출제수당(약 600만원)과 대강료(출제기간 동안 자신의 강의를 다른 사람이 맡도록 하고 그 비용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대납해주는 제도다. 약 250만원의 돈이 지급된다)를 합한 850만 원 정도를 챙긴 채, 학교로 돌아갔다.
그런데 어느 한 출제위원이 자기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고문관으로 전락하면, 그 부담이 다른 출제위원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총 20문항을 4명의 출제위원이 각각 5문항씩 출제해야 하는데, 어느 한 사람이 문항을 제대로 개발하지 못하면, 다른 출제위원이 2일~3일 동안 날밤을 세워가며 그 고문관의 몫까지 대신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시험문항을 많이 개발했다고 해서 출제수당과 대강료를 더 주지 않는다.
적어도 출제본부 안에서는 철저한 공산주의 사회가 유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만났던 대다수의 출제위원들은 막중한 책임의식과 소명의식을 갖고 양질의 문항을 개발하기 위해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출제본부 안에서 그런 분들을 많이 만나면서 그래도 우리나라는 희망이 있는 국가라고 확신했다.
한편, 어떤 고문관들은 시험문항을 하나도 개발하지 못하고 출제본부 안에서 자기만의 편안한 시간을 즐기면서 1달 부수입으로 850만원에 이르는 목돈을 챙겨가지고 유유히 사라지곤 한다.
그런데 이들 고문관은 동료 출제위원에 대한 미안함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는다.
자신 때문에 동료 출제위원이 밤잠을 설치는데도 따뜻한 위로나 사과의 인사조차 하지 않는다. 이기주의자도 그런 이기주의자가 없다.
나는 그런 양심불량의 고문관들은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나는 시험출제가 종료(입소 후, 15일이면 끝이 난다)되고 인쇄 작업에 돌입하면,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담당자에게 그에 대한 신상정보를 제공해서 ‘출제위원 인력 풀’에다 블랙리스트로 올리도록 제안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은 금쪽같은 국가예산을 탕진하게 하는 사람으로서 더 이상 출제위원직을 맡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좌파지향의 마피아들과 또 다른 공공의 적
제7차 교육과정부터는 그동안 대학교수들의 전유물로 간주되어 왔던 출제위원직이 일선 교사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나는 그런 조치들에 대해 매우 환영하는 입장이다. 실제로 나와 같이 팀워크를 이루면서 출제위원을 역임했던 교사들 가운데는 대학교수보다 출제능력이나 행정 처리능력이 뛰어난 분들이 적지 않았다.
교사들의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일어났다. 특히 각 영역별(예: 사회탐구, 수리영역, 과학탐구)로 이루어지는 제1, 2, 3차 문항검토와 최종확정 단계에서 큰 목소리를 내려는 일부 좌파지향의 마피아와 검토위원들의 집단적인 횡포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제6차 교육과정 때에 문제가 되었던 서울대 마피아들의 횡포는 이제 좌파 지향의 교사들과 검토위원들의 손으로 고스란히 넘어간 상태다.
그들에게는 출제위원들이 출제한 시험문항에 대해서 마음 놓고 비토 할 수 있는 권한만 주고, 그것이 초래할 사후상황에 대해서는 하등의 책임을 묻지 않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참여정부, 교육인적자원부,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내에 골수 좌파인사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권한만 주어지고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폭력행위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직접 경험한 하나의 사례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나는 시험문항을 개발할 때, 만화를 곁들인 출제를 무척 선호한다.
한번은 ‘외부효과’라는 경제문항을 개발하면서 ‘병원에서 내 돈을 주고 맞는 독감예방접종도 외부경제에 속 한다’는 취지의 만화를 제공하고 그에 대한 기술記述의 옳고 그름을 묻는 문항을 개발했다.
그러자 고교 교사 4명으로 구성된 검토위원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런 표현은 고교 경제교과서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 문제는 오답시비가 발생할 소지가 크다”라며 반발했다.
그런데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출제위원보다 검토위원들에게 더 큰 힘을 실어주고 있다.
즉 검토위원들이 끝까지 거부하고 저항하면, 그 문제는 아무리 좋더라도 확인 사살을 당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서울대 출신 마피아들이 저지른 횡포보다 죄질이 더 고약한 행위인데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개선이 되지 않고 있다.
결국 내가 출제한 만화문제는 윗선의 개입에 의해 적당한 타협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검토위원들에게 “그러면 당신들의 입맛대로 수정해보라.”고 주문하고, “추후 그에 따른 문제가 발생하면 나중에 당신들이 책임을 지고 해명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실제로 그 문항에 대한 이의신청이 10여명의 수험생들로부터 접수되었다. 내 사전에 처음 있는 일이었고, 나는 검토위원들에 대해 분노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사회탐구 담당자는 나에게 해명자료를 만들어줄 것을 요구했다. 나는 한마디로 거부했다.
“한 달 전, 검토위원들이 내가 출제한 시험문항에 대해 칼질을 할 때, 내가 당신들(검토위원들, 기획위원,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담당자)에게 한 말을 기억하고 있지 않냐?, 그로 인한 모든 책임은 당신들이 맡기로 하지 않았냐?,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엉뚱한 얘기를 하는가?”
그러자 담당자는 “정말로 죄송하다. 이번 한번만 봐 달라”며 애걸복걸 했다. 결국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참고 그와의 옛정을 생각하면서 답변 자료를 준비했다.
그리고 그 내용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게시판에 올렸다. 다행스럽게도 10여명의 이의신청자들은 내가 올린 답변 자료에 수긍을 하고 더 이상의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다. 이때 내가 받았던 인간적인 수모는 지금도 잊혀 지지 않을 정도로 내 가슴 속에 깊이 박혀 있다.
또 한 번은 정부규제보다 시장기능이 우월하다는 문제를 출제했는데, 그때는 좌파지향의 다른 과목 출제위원들(그들은 전교조 소속의 현직교사로서 3명~4명이 항상 떼를 지어 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이 이리떼처럼 공격하는 바람에 스스로 시험문항을 자폭시켰던 기억도 있다.
창고의 곡식을 축내는 쥐를 잡는 방법으로 고양이와 빗자루의 예를 들면서 정부규제(빗자루로 쥐를 잡는 것)가 시장기능(고양이를 이용해서 쥐를 잡는 것)보다 비효율적임(시끄럽고 세간을 때려 부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을 강조한 문항이었는데 그들 전교조 교사들에게는 불경스런 문제로 비쳤던 모양이다.
성숙한 사회로의 진입을 기대하면서...
세계는 급변하고 있는데, 우리의 주위를 돌아보면 세계의 변화와는 높은 담을 쌓고 “내 배 째라!”라는 식으로 자신들의 우매한 논리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대학수학능력시험도 마찬가지다. 교육인적자원부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정답시비, 오답시비에 연연하지 말고 보다 세련되고, 창의적인 시험문항 개발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그래야만 아이들에게 공부하는 즐거움, 창의적인 문제를 통한 변별력의 확보 등을 제공할 수 있다. 이제 나는 출제위원으로서 미련 없는 퇴역을 하고자 마음먹었다.
국립대학 교수로서 국록을 받고 살아가는 입장이기 때문에, 출제위원으로서 7차례에 걸친 사회봉사를 묵묵히 수행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나보다 훨씬 더 유능하고 참신한 젊은 교수들에게 그 역할을 넘겨주면서 용퇴를 하는 게 보기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미련 없이 떠나면서 그에 얽힌 얘기를 소상하게 해줌으로써 수험생들과 일반 국민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 주고 싶었다.
나는 오늘 이 시간에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완벽을 기하기 위해서 노심초사하고 있을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사람들의 노고에 대해서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시험문항을 한 개만 잘못 출제해도 사회적 몰매를 가하는 우리 사회의 천박성이 고쳐지지 않는 한, 그들은 위축된 자세로 출제시스템을 운영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우리 아이들은 항상 틀에 박힌 엉성한 문제로 자신들의 학습능력을 평가받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의 성숙한 변화를 기대해 본다.
김덕수 교수 |
충북대학교 경제학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석박사과정을 이수하고 1995년도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동안 한국증권거래소 조사부, 고려대학교 강사, KAIST 경제분석연구실 선임연구원, 일본 과학기술정책연구소 객원연구원,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위원, 중등임용고사 출제위원, 국무총리실 소속 산업기술연구회 정부출연구소 기관평가위원, 자유민주연합 혁신위원회 위원장, 대구교통방송 경제해설위원, 공주대학교 기획연구부처장을 역임했다. 현재 공주대학교 교수회장 겸 사범대학 일반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생각을 달리하면 희망이 보인다>, <김덕수 교수의 통쾌한 경제학>, <김덕수 교수의 경제 IQ높이기>, <김덕수 교수의 경제 EQ높이기>, <맨주먹의 CEO 이순신에게 배워라>, <한국형 리더와 리더십>, <게임의 지배법칙으로 자기를 경영하라> 등 다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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