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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송산리 고분군을 답사하면서 해설사 최병옥(崔炳玉) 선생으로부터 상세한 설명을 듣고 있다. |
무령왕릉의 특징(特徵)은 무령왕, 왕비, 향(向) 머리 방향이 산 쪽의 반대 산 아래로 향해 있으며, 좌향(坐向)을 알 수 없다.
또 매지권(買地券)에 토지신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풍수지리적인 내용이나 도교사상을 엿볼 수 있으며, 제왕께서도 사직(社稷) 즉, 지신(地神)에게 폐백을 드린 것을 알 수 있다.
현재도 장례식의 하관시 산신제를 올리고 있는데 이를 현훈(玄纁)이라하며, 청실, 홍실, 폐백을 드리는 것은 예로부터의 전통이다.
지난 5월 13일 사단법인 대동풍수지리학회(大東風水地理學會) 구성회(九星會)회원 25명은 공주시 명당(明堂) 길지(吉地)를 찾아 나섰다.
오전에 장기면 대교리 김종서 장군 묘소 답산 하고, 연문 광장 옆 고마나루 돌쌈밥 집 에서 점심 식사 후 무령왕릉 송산리 고분군으로 향했다.
나지막한 구릉인 송산에서 이름을 땄기에 예전에는 송산리였지만 지금은 금성동인 이곳에는 구릉 중턱 남쪽 경사면에 계곡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갈라져 고분이 모두 일곱 채가 뚜렷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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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
동북쪽에는 1호부터 4호분까지가, 서쪽에는 5호와 6호분 그리고 무령왕릉이 있다. 그밖에도 봉분이 분명하지 않은 것이 지하에 많아 사적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
무령왕은 백제 개로왕 8년(462년), 임인(壬寅)生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사마(斯麻)ㆍ륭(隆), 시호(諡號)는 무령이라 하였다.
그는 8척 장신의 키에 이목구비(耳目口鼻)가 수려하고 인자하기 이를 데 없어 나라의 민심이 잘 따랐다고 전하고 있다.
서기 501년, 신사(辛巳)年 동성왕의 뒤를 이어 40세에 왕위에 올라 523년 계묘(癸卯)年 62세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3년간 백제 25대왕으로 통치하였다.
무령왕릉은 백제 제25대 무령왕과 왕비와 능으로 웅진시대 백제의 고분들로 이뤄진 송산리 고분군 가운데 전축분(塼築墳)인 6호분과(일제강점기에 일본인 도굴) 석실분(石室墳)인 5호분의 가운데 뒷면에서 남쪽을 향해 자리 잡고 있다.
1971년 송산리 제5.6호 고분의 침수방지를 위한 배수로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되어 약 1,500년만에 처녀분이 발굴되었다.
특히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 부부라는 사실이 명백히 기록되어 있어 세상 사람들을 크게 흥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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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내부 모습. |
모형관 무덤의 구조를 보면 들어가는 연도(沿道) 입구와 왕과 왕비를 모신 현실의 방과 배수로 나누어진다.
현실의 벽면에는 등잔을 두기 위하여 북벽에 1개, 동·서벽에 2개씩 모두 5개소의 작은 벽으로 청자 등잔을 배치하였다.
등 밑에는 각각 창을 상징하는 모양을 시설함으로써 방안에 조명과 함께 영원으로 향한 창문들이 갖추어진 건축물임을 알 수 있다.
바닥구조는 먼저 암반을 평탄하게 깎아 낸 후 그 상면에 벽돌을 삿자리 모양으로 배열하고, 벽돌 사이에는 석회를 발라 암반에 고정시켜 깔았다.
바닥의 높이는 묘실의 바닥보다 높아 관대(棺臺)와 동일하게 하였다. 발굴당시 명문전이 발견되었는데 "..士 壬辰年作(..임진년작)(512년)"이라고 기록이 있는바 무령왕이 승하(523)한 계묘(癸卯)年의 11년 전인 512년, 임진(壬辰)年에 축조 또는 준비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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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지권(買地券) 내용. |
출토유물은 모두 108종 2,906점에 이른다 하며, 중요한 것으로는 연도(沿道) 입구에 동발(銅鉢)과 청자 등이 쓰러져 있었고, 바로 그 뒤에는 왕과 왕비의 지석(誌石) 2매가 놓여 있었다.
이 지석은 우리나라 지석 중 가장 오래 된 것일 뿐만 아니라 이 지석이 출토됨으로써 무령왕릉은 삼국시대의 왕릉 중 피장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무덤이 되었다.
출토된 지석 2장이 고분 축조연대를 분명히 제시해주었기 때문에, 왕릉 출토유물은 삼국시대 고고학 연구 특히 편년(編年, 년대를 따라서 역사를 편찬) 연구에 기준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매지권(買地券)은 백제인들의 사상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매지권(買地券)을 보면서 초상(初喪) 또는 면례(緬禮, 이장(移葬))때에 청실홍실을 산신(山神)께 드리는 폐백(幣帛) 전통(傳統)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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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출생.
前 우성새마을금고 7, 8대 이사장. 현 (사)이산전통풍수지리연구회 이사. 전 공주대 평생교육원 풍수지리 강사.
C.P :016-404-1434 |
智山 이원행 |
현실의 남쪽에도 동발(銅鉢)과 청자 등이 쓰러져 있었으며, 현실의 관대 위에는 원래 왕의 목관은 동쪽에, 왕비의 목관은 서쪽에 놓여 있던 것이 썩으면서 쓰러져 서로 겹쳐서 있었다.
특이(特異)한 점은 향(向)이 山쪽이 아니라, 산 아래 낮은 곳 즉, 물 흐르는 방향으로 시신(屍身)의 머리를 향하게 했다는 점이다.
한편, 이날 인해(仁海) 이갑수 前 탄천면장의 주선으로 무령왕릉 최고의 해설사인 최병옥(崔炳玉) 선생을 모시고 깊고 풍부한 해설을 들을 수 있었던 것에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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