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근 50년을 살아오면서 아버지를 단 한 번도 아빠라고 불러보지 못했다. 유년기에는 과묵하셨던 아버지가 무서워서 감히 아빠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철이 들고부터는 아빠라는 단어가 낯간지러워서 사용하지 못했다. 다만, 가장家長의 권위주의에 대한 반감, 부자父子간의 미묘한 거리감으로 점철된 ‘아부지’라는 용어로 아빠를 대신하고 말았다.
이제 두 아들을 키우면서 하루에도 몇 차례씩 아빠라는 말을 들으며 생활하고 있다. 퇴근해서 아파트의 초인종을 누르면, “아빠야?”하며 반갑게 문을 열어주는 막둥이 녀석을 보면서 약 10년 전에 작고하신 아버지를 떠올려보곤 한다.
필자는 한 아이의 아빠가 되고도 한참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아버지의 고독과 번민을 이해할 수 있었다.
“소금의 고마움은 그것이 떨어졌을 때 알게 되고, 아버지의 고마움은 돌아가신 뒤에야 알게 된다”는 인도의 속담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도 그때쯤이었다.
또 김현승 시인이 쓴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라는 ‘아버지의 마음’을 읽으며, 아버지에게 무관심했던 과거를 후회했던 것도 얼마 전의 일이다.
아부지들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과거 농경시대나 봉건시대의 아버지들은 공동체 사회의 암묵적 규약과 남성 특유의 완력을 바탕으로 장유유서와 가부장적 질서를 확실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업화시대의 도래로 기계가 남성의 힘을 대신하고, 핵가족화와 가전제품의 등장으로 여성의 여가시간과 사회활동이 늘어나면서 일벌레 아버지들의 권위는 맥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 때, 도시의 공장근로자로 전락한 일벌레 아버지들이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주로 사용했던 것은 용돈이나 선물을 통한 자녀들의 ‘비위 맞추기’였다.
또 초등학교 아이들이 즐겨 부르는 동요에 나오는 것처럼, 시장에 가서 비단구두를 사오거나, 아이들이 좋아하는 나팔꽃을 기르기 위해 새끼줄이라도 매어주는 아버지가 되어야만 그럭저럭 아버지로서의 체면과 위신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런데 예고도 없이 다가온 디지털 혁명의 후後폭풍으로 직장에서 쫓겨나는 일벌레 아버지들이 늘어나면서 40대~50대 가장들의 권위는 한마디로 설 땅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더욱이 랩 음악, 테크노-댄스, 컴퓨터, 영어실력으로 무장된 자녀들과 대화조차 되지 않는 일벌레 아버지들은 그들의 어떠한 물음에 대해서도 아부지我不知, 즉 “나는 알지 못 한다”로 일관할 수밖에 없다.
1960~1970년대의 일벌레 아부지가 권위주의시대를 대변하는 애증愛憎의 용어였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40~50대의 일벌레 아부지들은 디지털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낙오자들만이 갖는 회한悔恨과 설움의 단어다.
성의 쾌락추구를 비롯한 인간본능의 해방을 주장하며 1960년대 서구 학생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던, 독일 태생의 미국인 비평가 마르쿠제는 이미 오래 전에 일벌레 아버지들의 권위추락을 예상했다.
그는 “우리 시대의 아버지는 죽었다. 이제 아버지는 아이를 생산하기 위한 정자精子를 공급하는 것 이외에 그 어떤 존재이유도 갖지 못 한다”고 선언해 버렸다.
독일의 시인이며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였던 니체가 신의 사망선고를 내렸던 것처럼, 마르쿠제가 일벌레 아버지들을 죽임으로써 오이디푸스oedipus시대를 열어 놓았다.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 역시 그러한 시대적 배경을 갖고 있기에, 가족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했던 일벌레 아버지들의 강력한 권위에 대한 향수나 안타까움을 갖고 있는 수많은 독자들의 코 눈물을 자아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우리들이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항이 하나 있다. 그것은 ‘아버지가 없는 사회’의 저자인 폴 페데른, ‘고독한 군중’의 저자인 리스먼과 같은 지성들이 지적하는 고언苦言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오늘날 우리 청소년들의 비행과 폭력성에 대한 근본원인을 아버지들의 권위상실과 그로 인한 가정 내 부권父權의 실종에서 찾고 있다.
즉 올바른 자녀교육을 위해서는 부모 간에 균형 잡힌 역할이 매우 중요한데, 아버지들의 권위실추로 그만 부父의 역할이 블랙홀에 빠져버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일벌레 아버지들이 겪고 있는 시련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투철한 애사심을 바탕으로 조직발전을 위해 산업전사産業戰士로서의 미션을 100% 수행했던 일벌레 아버지들이 유연성, 창의성, 스피드, 도전정신이 요구되는 디지털시대에 잘 적응하지 못한데 있다.
즉 시대의 급격한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일벌레 아버지들이 퇴출 대상으로 지목되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경제력을 상실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다.
‘남편 기 살리기’ 담론은 시대착오적인 발상
한편, 일벌레 아버지들의 경제력 상실과 그에 따른 가장으로서의 권위추락은 자살과 가출, 이혼의 급증, 청소년 비행의 심화와 같은 사회적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런 와중에서 핫-이슈로 제기된 것이 ‘남편 기氣 살리기’라는 사회적 담론이다. 그것은 가정주부들에게 비록 남편들이 밖에 나가 돈을 벌어오지 못하더라도 바가지를 긁지 말고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해주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남편 기 살리기’의 담론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사회적 위기와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간파하지 못한 상태에서 급조된 함량미달의 대안에 불과하다.
‘남편 기 살리기’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엄격한 성별 분업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 성별 분업이란, 남편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밖에 나가 돈을 벌어야 하고 아내는 그런 남편에게 순종하면서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업에 따른 경제적 고통은 남편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성별 분업의 경계가 확실하면 할수록 남편의 일자리 상실로 경제적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오히려 아내 쪽이다.
아내는 남편의 기를 살려 주기 위해 백수 남편의 눈치를 더 살펴야 하고, 아내가 취업을 하는 경우에도 남편의 자존심이 상할까봐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아내는 남편에게 가사노동에 대한 분담요구를 포기하고, 취업과 육아, 가사노동의 전담이라는 삼중고三重苦를 고스란히 감내해야 한다.
이처럼 경직적인 성별 분업의 논리와 ‘남편 기 살리기’가 계속되는 한, 삶의 무게에 눌려버린 아내들은 무능한 남편을 마음속으로 원망하고 비난하다 끝내 가족 해체를 결심하기에 이른다.
또 남편들은 자신의 무능력을 탓하며 가족과 가정으로부터 일탈하여 홈리스homeless족으로 전락하거나 극단적인 경우에는 자살로 삶을 마감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도 ‘남편 기 살리기’는 사회적 대안이 되지 못한다.
지금의 디지털 시대는 우리들에게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요구한다. 이제는 어디에도 평생직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앞으로는 아내가 취업해서 가족의 생존을 책임지고, 남편이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남편들의 권위를 진정으로 추켜세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남편들은 경제력을 지닌 가장이어야 한다”라는 삶의 굴레로부터 해방시켜 줄 필요가 있다.
그와 함께 지금까지 아내들에게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좌절감을 안겨주었던 육아와 가사의 분담을 남편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해 나가야 한다.
일벌레 아부지들의 새로운 변신을 기대한다!
말 그대로 현재는 변화와 도전이 요구되는 새로운 시대다. 이러한 시기에 요구되는 바람직한 아버지 상象은, 어떠한 시련이 닥쳐온다 해도 그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열심히 개척해 나가는 아버지이다.
그를 위해 우리 아버지들은 창의적인 생각과 열정적인 자세로 자기혁신을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한다.
요즘 세대의 자녀들은, 한마디의 영어라도 더 배우려고 노력하는 아버지, 컴퓨터에 익숙해지려고 최선을 다하는 아버지들을 좋아한다.
또 자녀들은 불치하문不恥下問의 자세로, 미지未知의 세계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해 나가는 진취적인 아버지들에게 뜨거운 애정과 박수갈채를 보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날로그 시대의 일벌레 아부지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족탈불급足脫不及의 자학적 심정으로 디지털식 아빠로 거듭 태어나기 위한 수受․파破․창創 프로세스(남의 좋은 것을 받아들인 다음 창조적으로 파괴해서 자기고유의 독창적인 것을 재창조하는 것으로서 필자가 외부강연을 위해 새롭게 고안한 개념이다)의 가동稼動을 중지하는 일이다.
여기에는 아내들의 따뜻한 협조와 진정한 동반자(가수 태진아도 ‘동반자’라는 노래를 열심히 부르고 있다.)의식도 필요하다.
그동안 우리 사회의 일부 아내들은 고급 옷 바람, 계 바람, 치맛바람, 애인 바람과 같은 온갖 장풍長風을 휘둘러대면서 자녀들 앞에서 자기 남편들의 권위를 사정없이 깎아내렸던 것도 사실이다.
이제 그런 아내들은 거울 앞에 선 큰 누님 같은 넉넉한 자세로 한없이 마이크로화된 아부지들의 위상位相을 높여 줌으로써 남편들이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훌륭한 아버지로서 자기변신에 성공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와줄 필요가 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옛말도 있지 않는가!
결론적으로, 아내와 자식들 앞에서 회사 일을 제외하곤 ‘나는 그 어떤 것도 잘 알지 못한다.’는 의미의 아부지我不知를 외치며 스스로 부父의 권위와 역할을 폄하시키거나 포기하려는 아부지들은 더 이상 성공적인 아빠가 될 수 없다.
또 그런 아부지들로 가득 찬 나라는, 결코 디지털 시대를 선도하는 일등국가로의 진입을 꿈꿀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좌절과 번민으로 방황하고 있을 일벌레 아부지들에게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살아서 이 세계의 무의미無意味와 싸워야 한다”고 역설했던 문학평론가 김현(서울대 불문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1990년에 사망했다.)의 얘기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우리 시대의 블랙홀인 무의미와 정면으로 맞서 싸우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가는 아부지들의 열정적인 모습을 기대한다.
김덕수 교수 |
충북대학교 경제학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석박사과정을 이수하고 1995년도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동안 한국증권거래소 조사부, 고려대학교 강사, KAIST 경제분석연구실 선임연구원, 일본 과학기술정책연구소 객원연구원,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위원, 중등임용고사 출제위원, 국무총리실 소속 산업기술연구회 정부출연구소 기관평가위원, 자유민주연합 혁신위원회 위원장, 대구교통방송 경제해설위원, 공주대학교 기획연구부처장을 역임했다. 현재 공주대학교 교수회장 겸 사범대학 일반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생각을 달리하면 희망이 보인다>, <김덕수 교수의 통쾌한 경제학>, <김덕수 교수의 경제 IQ높이기>, <김덕수 교수의 경제 EQ높이기>, <맨주먹의 CEO 이순신에게 배워라>, <한국형 리더와 리더십>, <게임의 지배법칙으로 자기를 경영하라> 등 다수가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