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참마속(泣斬馬謖), 법치를 바로 세워야

2007. 3. 11. 22:51아름다운 글

읍참마속(泣斬馬謖), 법치를 바로 세워야
신평자시민기자 칼럼
2007-03-11 22:14:10 function sendemail(w,h){ var sWinName = "emailarticle"; var cScroll = 0; var cResize = 0; var cTool = 0; var sWinopts = 'left=' + ((screen.width-w)/2) + ', top=' + ((screen.height-h)/2) + ', width='+w+',height='+h+', scrollbars='+cScroll+', resizable='+cResize; window.open('./?doc=function/mail.php&bo_table=writing&wr_id=3543',sWinName,sWinopts); } function sendprint(){ var sWinName = "printarticle"; var cScroll = 1; var cResize = 1; var cTool = 1; var sWinopts = 'left='+0+', top='+0+', width='+720+', scrollbars='+cScroll+', resizable='+cResize; window.open('./?doc=function/print.php&bo_table=writing&wr_id=3543',sWinName,sWinopts); }

읍참마속(泣斬馬謖)은 울며 마속(馬謖)의 목을 벤다는 뜻으로 ‘촉지(蜀誌)’ ‘마속전(馬謖傳)’에 나오는 말이다.

이는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엄정히 법을 지켜 기강을 바로 세우는 일을 비유하는 말로 촉(蜀)나라의 제갈 량(諸葛亮)은 가정(街亭) 전투에서 명령을 따르지 않아 패한 부장(部將) 마속을 울며 목을 베어 전군의 본보기로 삼았다는 고사에서 비롯됐다.

삼국시대 초엽인 촉(蜀)나라 건흥(建興) 5년(227) 3월, 제갈량(諸葛亮)은 대군을 이끌고 성도(成都)를 출발했다.

곧 한중(漢中)을 석권하고 기산(祁山)으로 진출하여 위(魏)나라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그러자 조조(曹操)가 급파한 위나라의 명장 사마의(司馬懿)는 20만 대군으로 기산의 산야에 부채꼴의 진을 치고 제갈량의 침공군과 대치했다.

제갈량은 사마의를 칠 계책을 미리 세워 놓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지략이 뛰어난 사마의인 만큼 군량 수송로의 동쪽 가정(街亭)을 수비하는 것이 문제였다.

만약 가정을 잃으면 중원(中原) 진출의 웅대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런데 그 중책을 맡길 만한 장수가 없어 제갈량은 고민했다.

그때 마속(馬謖)이 자원하고 나섰다. 그는 제갈량과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은 참모 마량(馬良)의 동생으로, 평소 제갈량이 아끼는 장수 중 하나였다.

제갈량이 주저하자 마속은 "다년간 병략(兵略)을 익혔는데 어찌 가정 하나 지켜 내지 못하겠는가? 만약 패하면, 저는 물론 일가권속(一家眷屬)까지 참형을 당해도 결코 원망하지 않겠습니다"라며 거듭 간청했다.

이에 제갈량은 王平을 골라 副將으로 삼아 마속의 출정을 허락한다. 서둘러 가정에 도착한 마속은 삼면이 절벽을 이룬 지형을 보고 산기슭의 도로를 사수하라는 제갈량의 명령을 어기고 적을 유인해 역공할 생각으로 산 위에 진을 쳤다.

그러나 위나라 군사는 산기슭을 포위한 채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식수가 끊긴 마속은 全병력으로 포위망을 뚫으려 했으나 용장인 장합에게 참패하고 만다.

전군을 한중으로 후퇴시킨 제갈량은 마속에게 중책을 맡겼던 것을 크게 후회했다. 이듬해(228) 5월, 마속이 처형되는 날이 오자 때마침 성도에서 연락관으로 와 있던 장완(張浣)은 “천하를 평정하려는 이때에 마속 같은 유능한 장수를 잃는 것은 나라의 큰 손실”이라고 설득했으나 제갈량은 듣지 않았다.

제갈량은 눈물을 흘리며 “손무가 항상 싸워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군율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마속을 잃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기는 하나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군율을 무시하게 된다면 대의를 그르칠까 염려된다”며 형리를 재촉해 마속을 베게 했다.

마속이 형장으로 끌려가자 공명은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바닥에 엎드려 “마속이여, 용서하라. 내가 똑똑하지 못해 네가 죽었으나 그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도모해야 하기 때문에 내 목을 칠 수도 없구나”라며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이처럼 제갈량은 서로 죽음을 함께하기로 한 친구 마량의 동생을 사사로운 정에 이끌리지 않고 공명정대하게 법집행을 함으로써 全軍의 본보기로 삼았다.

이 사건과 관련해 유비(劉備)의 덕치(德治)와 제갈량의 법치(法治)를 비교하면서 제갈량이 제왕으로서의 능력부족을 지적하기도 한다.

유비는 관우와 장비를 비롯한 휘하 장수들의 수십 번의 패배에 대해 관대하면서도 기강을 유지했으나 제갈량은 자신의 후계자로 키웠던 장자방(책략가) 마속을 제대로 검증하지도 않은 채 가장 중요한 전투에 투입시키고, 단 한 번의 패배에도 참수까지 한 것은 신중치 못한 판단이라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이 눈물을 머금고 마속을 벤 일화는 엄정하고 공명정대한 법 집행의 표본이 되고 있다.

공명정대한 법 집행은 곧 법치주의를 의미한다. 민주주의 체제유지 근간은 법치주의 확립에 있으며, 이러한 법치주의 확립은 헌법에 명시된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사법적 평등을 구현함에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우리나라는 사법적 평등이라는 헌법정신에 입각한 법치주의를 바탕으로 국법질서를 확립해야 함은 물론 사법적 평등을 구현해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구성원들은 ‘고무줄 잣대’, ‘유전무죄, 무전유죄’와 같은 비판적인 법 감정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한때 TV 시리즈물 ‘판관 포청천’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인기리에 방영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시민들의 법 감정을 잘 대변한 결과로 나름의 카타르시스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실제로 ‘판관 포청천’의 주인공이었던 ‘포증’은 중국 송나라의 정치인이자 관료로 청백리(淸白吏)의 전형이자 부패한 정치가들을 엄벌, 공명정대한 법 집행관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근대사에 있어서 불행히도 법치주의 국가의 길을 걸어오지 못했다.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어야할 법이 돈과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고, 심지어 법위에 군림하면서 우리의 법체계는 왜곡되어 왔다.

이러한 법체계에 대한 불신이 오늘 공권력을 땅에 떨어트리고, 폭력과 불법이 난무하고, 돈이나 든든한 '빽'을 앞세우거나 큰소리가 판을 치는 '법이 죽은 사회'를 만들고 말았다.

법이 형평성을 잃었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법을 준수하기보다는 법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축적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데, 이러한 이기주의의 원리를 부채질한 것이 바로 국가다.

법의 형평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람들이 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 때와 그 법이 공평하게 적용돼 자신의 권리를 유보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낄 때 가능하다.

그동안 권위주위 정부와 일부 특권층만을 위한 '엉터리 법치' 또는 '엉터리 민주주의'라는 비아냥을 떨치기 위해 우리 사회 곳곳에서 개혁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아울러 '그토록 어렵게 쟁취한 민주주의를 우리는 제대로 운영하고 있는가?'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 또한 높다.

가장 중요한 것은 법치를 어떻게 뿌리 내리게 하느냐가 관건이다. 법치를 정착시키지 않고서는 모든 구성원들의 참 행복을 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법치주의는 곧 법이 지배하는 사회(rule of law) 즉, 규칙과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이자 상식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말한다.

이제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참다운 민주 사회를 만들기 위해 사회 구성원 전체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 공주뉴스=신평자시민 기자/ leeguny98@paran.com> >> 신평자시민 기자 의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