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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식(84) 할머니 |
공주시 신관동 정연식(84) 할머니가 자신의 손재주를 살려 주위를 훈훈하게 하고 있다.
연세 많은 노인이 훌륭한 일을 한다는 제보를 받고 정할머니가 사는 공주시 신관동 현대1차 아파트를 찾아갔다.
기자가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할머니가 직접 그린 그림들과 종이접기 모형들로 가득했다.
"원래 솜씨가 좋으신가 보죠?"고 묻자 "그냥 취미 삼아 그리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이 하나 둘씩 가져가기도 하고 반응이 괜찮다"고 대답한다.
기자가 좋은 일을 하신다고해서 얘기 좀 듣고 싶어서 왔다고 하자, 정할머니는 “아이고, 내가 뭐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기자양반까지 직접 찾아 오셨데”하며 인터뷰를 극구 사양했다.
기자의 끈질긴 부탁에 그냥 보내기 못내 서운했는지 옛날이야기부터 술술 풀어 놓았다.
어린 시절 뛰어놀던 그 짙푸르던 대동강에서의 추억, 일제 강점기 교편생활을 하며 모진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늦은 저녁 20리길을 마다않고 한글을 가르치기 위해 달려가던 아버지의 모습, 어린 동생들을 뒤로하고 서울로 시집오면서 끝내 이산가족이 되었고, 6.25동란 당시 폭격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편지로 전해들을 수 밖에 없었다는 가슴 아픈 사연들을 쏟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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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종이모형 등 집안 구석구석 정할머니의 작품들로 가득하다. |
불쌍한 이웃을 보면 측은지심이 발동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정할머니의 모습과 심지어 쓸쓸히 홀로 앉아있는 외국인에게까지 우리민요 ‘아리랑’을 불러주던 사연을 들으면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이 오늘의 정할머니 모습을 만들지 않았을까?
평양이 고향인 정할머니는 서울로 시집오면서 부모와 형제들과 떨어지게 됐다. 시집 온지 얼마 안 돼 6.25동란이 터지고 1.4후퇴 때 공주로 피난 내려오면서 공주에 터를 잡고 살게 됐다.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남달랐다는 정할머니는 “그 동안 바쁘게 살다보니 항상 마음뿐이지 이웃들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며 7~8년 전부터 장바구니를 만들어 이웃과 정을 나누다 보니 이제 습관처럼 돼 버렸다고 한다.
이웃과 정을 나누기 위해 처음 시작한 것이 ‘장바구니 만들기’였는데, 정부에서 ‘장바구니 들고 다니기 운동’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친척들에게 장바구니를 한 두 개씩 만들어 드렸더니 너무 반응이 좋아 노인정이나 노인대학 등에도 만들어주기 시작했다.
얼마 후 ‘장바구니 들고 다니기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방송에까지 출연하게 됐고, 지금도 그 때 만들어준 가방을 애지중지하며 “아직도 잘 쓰고 있다”며 인사하는 노인들을 만나면 “참으로 감사하고 흐뭇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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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낡은 재봉틀이지만 정할머니의 정성과 솜씨가 더해져 이웃들에게 훈훈한 감동을 만들어 내고 있다. |
이후 중학동에서 직조공장을 할 때 모아두었던 옷감이 있어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노인정에 있는 할머니·할아버지들이 집에서 편하게 입을 수 있도록 속바지를 만들게 됐다고 한다.
하루는 노인정에까지 속바지를 입고 와 “얼마나 따듯하고 편안한지 모르겠다”는 감사의 말에 용기를 얻어 옥룡동 금강사회복지관, 유구양로원, 왕촌 어버이집, 신관동사무소 등 시간 날 때마다 만들어 30장씩 수차례 보내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재작년 동사무소 경노잔치에 갔다가 우연히 앞 못 보는 할머니를 만나 “복지관에 가느냐?”, “속바지 받아 본 일이 있느냐?” 물었더니 “누가 해왔는지 몰라도 참 잘 입고 있다”는 말에 “가슴 뭉클 했다”며 작은 솜씨지만 이웃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용기백배 했단다.
작년에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겨울 속바지를 만들어 제공하고, 올해도 빼 놓지 않고 속바지 11벌을 만들어 제공했다. 또 틈틈이 가방과 속바지 이외에도 덧버선, 방석 등도 만들어 노인정에 제공하고 있다.
이용진 한국시각장애인연합공주지회장은 “얼마나 따듯하고 편안한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그 높은 연세에도 저희들을 위해서 애쓰시는 모습을 보면 한겨울에도 절로 따듯해집니다”라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시각장애인공주지회 김연수간사는 “저희도 6,000여명에 이르는 공주시 장애인들을 위해 심부름센터를 운영하면서 병원, 시장보기, 민원업무 등을 위해 이동봉사를 하고 있지만, 그 분을 보면 항상 부끄럽다”고 말했다.
이어 “이젠 연로하셔서 여러 가지로 불편하실 텐데도 그저 행복하다시며 어려운 이웃을 위해 애쓰시는 모습을 보면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한다”고 말했다.
정할머니는 이제 나이를 먹어 몸이 예전 같지 않지만 몸이 허락하는 한 작은 정성을 계속해서 이웃과 나누고 싶다며 “나이 먹어 주책이지,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내 자랑만 늘어놓았네”라며 지팡이를 짚은 불편한 몸으로 기자를 1층 입구까지 배웅 나왔다.
그러면서 “그저 취미삼아 재미삼아 한 일을 신문에 낸다니 창피하다”며 “신문에 내더라도 아주 작게 내달라”고 신신 당부했다.
정할머니는 기자가 “바람이 찬데 얼른 들어가시라”는 말에도 아랑곳없이 기자의 자동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내내 서 있었다.
이제 이 막바지 꽃샘추위가 가면 곧 따듯한 봄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고 정할머니에게도 좋은 봄소식이 북쪽에서 불어 왔으면 하는 바람이며, 그토록 까다로웠던 시어머니가 임종하시며 손을 꼭 잡고 “오래오래 살아라”하셨던 것처럼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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