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전국 유례없는 국왕 태실의 민간수호…공주시 태봉리 숙종태실

2024. 11. 24. 14:29생생공주

[기고] 전국 유례없는 국왕 태실의 민간수호…공주시 태봉리 숙종태실
기자명 이건용 기자   입력 2024.11.24 11:40  
최명진 공주시청 학예연구사(문학박사)

▲ 조선 16대 왕 숙종의 태실(胎室)이 조성된 충남 공주시 태봉동에 전해지는 마을계 문서 ‘태봉동의’. 최명진 공주시청 학예연구사 제공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아이의 태를 소중이 다루어 특별한 방법으로 처리하는 풍습이 있어왔다. 왕실은 태의 주인공이 곧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는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으므로 엄격한 처리방식을 거쳐 전국 풍수지리적 명당에 조성했다.

충남 공주시에는 조선 16대 왕 숙종의 태(胎)를 모신 태실이 있다. 1928~1930년 일제에 의해 전국의 조선왕실 태실들이 파괴되고 태항아리가 서삼릉으로 옮겨질 때 숙종의 태도 함께 이전됐다. 원래 태실이 조성됐던 장소에는 당시 세웠던 비석만 남아 있고, 점점 사회로부터 잊혀졌다.

최근 국가유산청이 조선왕조 태실의 세계유산 등재를 검토하면서 전국의 태실들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특히 국왕의 가봉 태실들이 그 중심에 있다. 가봉 태실은 태의 주인공이 성장해 국왕으로 즉위할 때 처음 조성한 아기태실지에 석물들을 화려하게 추가해 격을 올린 태실을 말한다.

숙종의 가봉 태실은 국왕 즉위 9년째인 1683년 조성됐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자연스럽게 ‘태봉리’로 불리는 마을이 생성돼 17세기 이후 공주 지역사에 등장했다. 현재 태봉동으로 불리는 이 마을은 숙종 태실과 약 245년간의 역사를 함께 한다.

그런데 최근 조선 후기 태봉리 주민들이 공동체 규약을 만들어 숙종 가봉 태실을 수호하는 일에 전념해 삶을 이어왔음을 보여주는 문서 ‘태봉동의’(胎封謄錄)가 확인돼 주목을 끌고 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밝혀지지 않았던 국왕태실의 민간수호 사례다.

가봉 태실은 국왕의 태가 모셔진 신성한 영역이자, 불가침의 구역이었다. 그러므로 태실의 관리는 막중했다. 태장의 예는 능, 원과 같다고 각종 사료에서도 수차례 언급돼 있었을 정도였지만, 한양 도성 근처에 조성된 왕릉과는 달리 전국 각 지역에 분포한 국왕 가봉태실이 어떻게 수호돼 왔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 없다.

태봉동의는 어떤 자료일까? ‘우리 십 수호의 민가는 즉 숙종대왕 태실을 수호하는 아랫마을이다. 옛날 태봉이 설치된 후 수호군색으로 명하여 다른 군으로 징발하지 못하도록 보호하였고, 민가를 위해서는 잡역과 더불어 환상 거두는 일을 겪지 않도록 한 일은 이미 예조에서 있었던 바이다. 십여 개 촌락이 각자 지성을 다하여 힘을 다해 우러러 받들어 수호하고 부모를 봉양하고 어른을 공경하고 덕 있는 사람을 아낀다. 어짐과 어리석음을 분별하며, 삶을 즐기고 죽음을 경계하되, 송사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이에 동계가 아니고 금송계의 이름으로 결성하여 거행하는 조건으로 이에 의거하여 좌측에 밝게 열거하여 산처럼 영구히 준행 한다.‘ 태봉리 주민들의 공동체 규약 ‘태봉동의’ 내용 일부다.

‘태봉동의‘는 1881년 마을 주민들에 의해 중수된 문서인데, 실제 계의 조직은 1866년이다. 책자 첫 페이지에 따르면 태봉 아래 십 수호정도 되는 민가가 살고 있고, 이들을 중심으로 계가 조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남자들이 수호군으로 명명돼 정군(正軍)에 징발되지 않고 오로지 태실 수호에만 전념했다는 사실이다.

또 책의 마지막부분에는 좌목이라 해 당시 계원으로 참여한 인물들의 이름이 있는데, 이중 이조면(李祖冕, 1816~?)은 1844년 29세에 진사시 1등에 선발된 인물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을 만든 공주 출신 유학자 송석 이병연(李秉延, 1894~1976)이 그의 손자다.

태봉리 주민들이 숙종의 위패를 모시고 산신제를 지내왔던 사실도 확인됐다. 현재 산신각 건물은 태봉산에 남아 있는데, 1937년 건립했음이 상량문에 남아있다. 필자가 만난 문서 소장자에 의하면 한국전쟁 즈음 제를 지내지 않게 됐다고 하며, 산신각은 오랫동안 방치돼 있다.

주목되는 점은 산신각을 짓고 제를 지낸 시기가 태항아리가 서삼릉으로 후라는 점이다. 제가 시작된 구체적인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분명 일제강점기 태실 수호의 임무가 종료됐음에도 그 전통이 남아 지속됐다는 점은 확실하다. 국왕의 태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이어가고자 한 마을의 정체성과 특수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최근 경기, 충남, 충북, 경북 광역단체에서는 세계유산 등재추진 협의체 구성 등 연속 유산으로의 등재를 위해 본격적인 협력을 추진할 예정으로 무엇보다 세계유산 등재에 합당한 여건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 중 태실 보존관리에 있어 지역민이 수호주체로 활동했던 공주 숙종태실과 태봉리의 사례는 중요한 가치로 다뤄져야 할 것이다.

해당 기고는 ‘조선후기 국왕 가봉 태실의 민간 수호(守護) 연구, 공주 숙종 태실과 태봉동 문서를 중심으로’를 간략하게 정리한 것으로, 관련 연구논문은 오는 12월 말 발간되는 충청지역 최고 권위의 전문학술지(KCI 등재학술지) ‘충청학과 충청문화’ 제37집에 수록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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