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1. 5. 15:20ㆍ아름다운 글
[기자수첩] 최원철호의 결단 ··· 실리와 명분
기자명 이건용 기자 입력 2023.11.05 07:25
“오랑캐의 발밑을 기어서라도 제 나라 백성이 살아서 걸어갈 길을 열어줄 수 있는 자만이 비로소 신하와 백성이 마음으로 따를 수 있는 임금이옵니다. 부디 전하께선 이 치욕을 견뎌주소서.”
“한나라의 국왕이 오랑캐에 맞서 떳떳한 죽음을 맞을지언정, 어찌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치욕스러운 삶을 구걸하려하시옵니까. 저는 차마 그런 임금은 받들지도, 지켜볼 수도 없으니 지금 이 자리에서 신의 목을 베소서.”
지난 2017년 10월 개봉한 영화 ‘남한산성’의 명대사다. 주화파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 분)과 척화파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 분)은 각자의 방식으로 나라와 백성을 위한 길을 찾고 있다. 죽음을 택한 김상헌의 명분과 실리를 택한 최명길이 대립한다.
인조(박해일 분)는 끝내 청나라 태종 앞에 무릎을 꿇는다. 신하의 복장으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다.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로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장면 중 하나다.
삼전도의 굴욕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이 당리당략만 일삼았던 탓이다. 앞선 조선의 15대 왕 광해군(光海君)의 실리외교를 배척한 탓이다. 광해군(光海君)은 조정 대신들과 사대부들이 목숨같이 섬기는 명나라와 세력을 키우고 있는 후금(청나라) 사이에서 중립을 택했다.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다시 세우고, 명나라와 후금(청나라) 사이에서 실리외교로 나라의 안정을 꾀하고자 했다.
하지만 광해군의 실리외교는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막을 내린다. 광해군을 폭군(暴君)으로 내몰고 왕이 된 인조는 후금 즉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무시했다.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반대하는 정책을 펴던 인조는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우리 역사상 최대의 치욕을 당하게 된다.
최근 백제문화제 격년 개최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이웃한 공주시와 부여군의 생각이 다르다. 부여군은 ‘격년제’를 강력 주장하는 반면 공주시는 현행대로 동시 개최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지난 10월 9일 대백제전 폐막식에서도 이 문제가 거론됐다. 박정현 부여군수는 백제문화제 동시 개최의 문제점을 언급하며 ‘격년제’를 제안했다. 하지만 최원철 공주시장의 입장은 단호하다.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최원철 시장의 단호한 어조는 공주시민들의 뜻이기도 하다. 백제문화제는 공주시의 최대 이벤트이자 콘텐츠다. 지역경제 활성화는 물론 공주를 알리는데 있어 최대 효자다. 사계절 축제의 중심축으로, 공주를 대표하는 가을 축제로 완전하게 자리 잡으면서 백제문화제를 빼놓고는 축제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물러서거나 양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셈이다. 민선7기 김정섭 시장이 격년제에 덜컥 합의했다가 주민 반발이라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해 사상 초유의 ‘주민소환’ 사태를 맞기도 했다. 결국 최원철 시장 또한 공주시민들의 의중에 반기를 들 수 없는 지경이다.
두 지자체의 서로 다른 생각과 셈법에 간극을 좁히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설령 입장 차를 좁히지 못해 ‘각자도생’의 길을 걷더라도, 기 싸움 또는 자존심 싸움으로 비춰져서는 곤란하다.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방안 마련에 머리를 맞대야 한다. 지방 소멸위기 속 역사문화자원의 힘을 바탕으로 자생력을 키우는 새로운 정책대안 마련의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송양지인(宋襄之仁)’. ‘송나라 양공(襄公)이 베푼 인의(仁義)’라는 의미로, 강을 건너는 적을 앞에 둔 유리한 상황에서 명분과 예의만을 앞세워 기다리다 결국 패배한 어리석음을 일컫는 말이다. 반대로 유방은 항우와의 전투에서 연전연패했지만, 신뢰라는 명분을 얻어 재기할 수 있었다. 실리를 택하느냐, 명분을 택하느냐의 기로에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순 없을까?
이건용 기자 lgy@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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