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수
공주대 교수

그것은 본질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사화와 당쟁이다. 자신들과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상대방 그룹을 죽이거나 정계에서 추방시켜야만 측근들의 벼슬자리가 대거 확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로-섬 게임의 속성을 지닌 사화와 당쟁은 결국 조선 사회의 국론 분열과 국가적 위기를 불러왔다.

둘째, 임금을 비롯한 문신들은 무신들을 한 단계 격이 낮은 사람으로 무시했다는 점이다. 최고 군사령관 자리는 언제나 문신의 몫이었다. 문제는 그런 문신들의 군사적 지식이나 경험이 일천했다는 사실이다. 군사에 문외한인 문신들은 군사 전문가인 무신들에게 엉터리 작전명령을 하달하고,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곤장을 치거나 죽였다.

일례로 1597년 1월 초, 왜군의 이중첩자 요시라의 반간계에 맥없이 넘어간 선조는 이순신에게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오는 가또 기요마사(加藤淸正)를 생포하라"고 지시했다. 선조가 요시라의 덫에 걸려들었다고 판단한 이순신은 임금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선조는 1597년 2월 26일 이순신을 한산도 본영에서 체포한 후, 한양으로 끌고 와서 죽이려고 했다. 용렬했던 선조가 이순신에게 뒤집어씌운 죄목 중 하나는 '임금과 조정을 기만한 죄'였다.

원균이 패배한 칠천량 해전에서도 그런 문제가 노정(露呈)되었다. 원균은 당초 칠천량 해전이 무리임을 깨닫고 좀더 유리한 상황에서 해전을 치를 기회를 탐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승전 소식에 목말라 하는 선조의 의중을 읽은 체찰사 이원익과 도원수 권율이 '묻지마 출전'을 강요했다. 그 결과는 칠천량해전에서의 참패로 이어졌다. 참고로 많은 사람들은 권율이 무신 출신의 장군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권율은 1582년 식년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한 문신 출신이다. 나는 지금도 칠천량해전의 패배는 선조에게 직언을 하지 못하고 조선 수군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권율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선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이 무신들을 얼마나 무시했는가는 조일전쟁이 끝난 후, 전쟁 공로자에 논공행상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1604년 10월 29일 조선 조정은 조일전쟁 때 공을 세운 공신들을 세 가지로 분류해서 발표했다. 즉 뛰어난 무공으로 국난 극복에 앞장섰던 선무공신(宣武功臣), 도망치는 선조를 잘 따르고 보필하는데 공을 세운 호성공신(扈聖功臣), 조일전쟁 중에 발생한 이몽학의 난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운 청난공신(淸難功臣)이 그들이다.

그런데 선조는 선무공신 18명, 호성공신 86명, 청난공신 5명을 임명했다. '망명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선조는 처음엔 선무공신 18명도 선정하지 않고 호성공신의 맨 끝에다 이순신을 비롯한 몇몇 무장만을 덧붙이려고 했다. 그러나 "호성공신의 말석에다 몇몇 무장들을 덧붙인다면, 필시 여러 장수들이 불만을 품을 것입니다"라는 이항복의 진언을 듣고 나서야 선무공신을 책정했다. 그것은 1601년 3월 17일자 ≪선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 같은 날 ≪선조실록≫을 보면, 선조가 이항복에게 "중국 군대의 힘이 아니면 왜적을 어떻게 물리쳤겠는가. 조선이 강토를 회복한 것은 모두 중국 군대의 공이다. 조선 사람은 한 일이 없다. 이는 내가 사실에 근거하여 한 말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임금이라는 자의 인식수준이 이 모양이니, 벌건 대낮에 왜적이 쳐들어오고 내부 반란이 일어나는 것이다.

중국 고전인 대학을 읽다보면 '심불재오시이불견 청이불문 식이부지기미(心不在焉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라는 글귀를 만날 수 있다. 그 의미는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는 뜻이다. 정말로 선조가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