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주도해나갈 한국적 리더십을 모색하고자 할 때, 필자에게 있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우리나라 지폐 속의 인물이 아니라 현대Hyundai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일궈냈던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하 정 회장)이다.
시대적인 측면에서 바라볼 때 정 회장은 20세기 한국의 산업화 사회를 선도한 기업가이었고, 21세기가 막 시작되던 2001년에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사람이다.
어떤 학자들은 “시대의 변화로 새로운 경영패러다임이 요구되고 있기 때문에 정 회장의 리더십도 이제는 끝났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견해에 찬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 회장에게서 21세기 디지털 리더십의 전형이 대거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정 회장은 21세기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벤처기업가보다 더 벤처정신이 왕성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한다.
그의 젊은 사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했던 뛰어난 판단력, 지칠 줄 모르는 도전정신과 용기, 인간을 중시했던 따뜻한 감성과 기발한 창의력, 신용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겼던 신용제일주의는 정 회장을 다른 CEO들과 차별시키는 핵심요소다.
만약 정 회장의 육신이 쇠잔해지지 않은 채, 21세기를 살고 있었다면 그는 지금도 21세기 한국의 지식정보화 사회를 이끄는 디지털 CEO로서 자기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내고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박사들보다 창의력이 출중했던 국졸 출신의 CEO
1998년 6월 16일, 정 회장은 500마리의 소 떼를 몰고 판문점을 거쳐 방북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그는 이미 대북경협사업의 물꼬를 텄던 것이다.
이것을 보고 세계적인 문화비평가인 프랑스의 기소르망은 ‘세기의 예술적 이벤트’라고 격찬했다.
또 1953년 겨울, 잔디를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푸른 색깔의 보리를 떠다가 심어 부산 유엔군 묘지의 잔디밭을 조성했던 사건, 세계의 토목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유조선공법(이는 서산A지구 방조제 물막이 공사 때, 정 회장이 활용했던 폐유조선공법을 지칭한다.)은 정 회장만이 할 수 있었던 특허상품이었다.
1974년에 개발한 100% 국산자동차 포니의 생산, 1975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산업항 공사 때 가로 18미터, 세로 20미터, 높이 36미터, 무게 550톤의 철 구조물 89개를 울산항에서 주베일항까지 바지선으로 끌고 갔던 기상천외한 발상도 정 회장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또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과 함께 했던 빨간 골프공 사건_눈이 쌓인 골프장에서 정 회장은 빨간색 칠을 한 골프공으로 평소처럼 골프를 즐겼다_은 신동神童의 천진난만함까지 느끼게 한다.
게다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활용한 옥스퍼드 유머로 영국의 버클레이즈 은행으로부터 조선소의 건립자금을 대출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정 회장 특유의 창의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 회장의 학력은 자신의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서당을 다닌 것과 강원도 통천의 송전 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전부다.
그렇게 가방 끈이 짧았던 정 회장은 주요 고비 때마다 뛰어난 창의력과 역발상으로 ‘현대’라는 기업을 비약적으로 업그레이드시켰다.
그 이면에는 어린 시절 정 회장이 서당에서 3년 동안 갈고 닦은 ‘소학’, ‘대학’, ‘자치통감’, ‘한시(漢詩; 오언시 칠언시)’에 대한 풍부한 교양과 문학 책의 탐독, 그리고 각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뛰어난 예술가들과의 폭넓은 교류가 있었다.
그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독서를 통한 지적 교양의 함양과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디지털 리더십의 절대 덕목임을 재확인할 수 있다.
탁월한 감성지수로 인재를 아꼈던 CEO
세계의 일류 CEO들이 그랬듯이 정 회장도 인재를 무척 중시했던 사람이다. 그는 인재를 선발할 때, 유비가 제갈공명에게 한 것처럼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자세로, 막내 사윗감을 고르듯이 신중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일단 인재를 뽑으면 그들에게 최대한의 권한을 부여해 주고 책임을 묻는 경영방식으로 일관했다.
그렇게 해서 선발한 공채 사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김윤규 전 현대아산 사장, 박세용 전 현대상선 사장, 이병규 전 현대백화점 사장 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공채 출신의 이들 가신그룹은 정 회장을 회장님이 아니라 아버님으로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또 정 회장은 일반 사원들에게도 근로자와 사용자의 관계가 아니라 한솥밥을 먹는 대가족의 입장에서 마치 큰형님 같은 존재였다는 것이 ‘현대맨’들의 공통된 견해다.
일반사원들의 연수 모임이나 수련회에 참여해서 씨름 시합을 하고, 자신의 18번인 ‘이거야 정말’이란 노래를 스스럼없이 부르면서 새벽녘까지 그들과 막걸리 파티를 벌이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정 회장의 인간적인 모습이 그것을 입증해 준다.
그는 말단 근로자의 가정집을 방문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사글세나 전세를 사는 근로자의 가정집을 찾아가서 그들의 형편을 살펴보며 애로사항을 듣는 일도 빠트리지 않았다.
이것은 ‘자신의 식솔인 근로자들을 따뜻하게 대해주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일등 상품과 서비스를 창출해내는 첩경’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인재를 중요시했던 그의 경영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가 현대맨들에게 즐겨 사용했다는 “나는 성공한 기업가가 아니라 단지 부유한 노동자일 뿐이다”라는 말의 진의는 그가 하늘나라로 떠난 후에 소상하게 밝혀졌다.
현대그룹의 총수로서 83개의 계열사와 1,000억 달러의 연간매출액(한국 돈으로 약 130조원)을 기록하며, 미국의 GE사나 일본의 도요타와 같은 초일류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세계를 호령하던 정 회장은 안방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가 살았던 청운동 자택에는 10년 이상은 족히 신었을 것 같은 낡은 구두, 구멍 난 면장갑, 카펫 대신 깔았던 흰 광목 천, 낡은 금성사의 텔레비전이 주인을 잃은 채 일반 서민의 살림살이만도 못했던 정 회장의 소박했던 삶을 얘기해 주고 있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한국 경제발전의 제1세대 선봉장 역할을 맡았던 정 회장은 철저하게 보통사람으로 살다가 보통사람으로 떠났던 것이다.
시대의 트렌드를 누구보다 잘 읽어냈던 20세기의 거인
정 회장은 돈 냄새에 예민한 후각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돈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정주영이 간다”, “큰물에 나가야 커다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돈의 흐름에 대한 정 회장의 뛰어난 동물적 감각은 어린 시절에 그가 결행했던 가출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뼈가 바스러지도록 일을 해도 식구들 입에 풀칠조차 하기 힘든 농사일이 그에게는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돈 벌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을 것 같은 서울로의 탈출을 4번씩이나 시도했다.
4번째의 가출을 통해 난생 처음으로 얻은 직장은 쌀가게였던 복흥상회의 배달원 자리였다.
그는 거기서 특유의 성실한 자세로 주인의 신임을 얻은 후, 그 가계를 물려받는 수완을 발휘한다.
그리고는 시대를 앞서가는 혜안慧眼으로 돈벌이가 되는 새로운 사업거리의 발굴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자동차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확신에서 자동차수리공장인 아도서비스를 인수하여 사업경험을 쌓은 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한 것이 1946년이다.
또 대구와 거창을 잇는 고령교 건설과 태국 파타니의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 받아 엄청난 손해를 보아가면서 토목과 건설경험을 쌓은 후, 경부고속도로의 건설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함으로써 현대건설을 세계 굴지의 일류회사로 발전시키는데 성공했다.
특히 주베일의 산업항 공사(1973년 오일쇼크 후, 정 회장은 달러가 귀해진 우리 경제에 천금 같은 공사 대금 9억 3,114만 달러를 벌어들임으로써 국가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는 자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아우 정인영과 다른 참모들이 모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정 회장은 특유의 뚝심과 배짱으로 밀고나가 마침내 대성공을 거둔 초대형 건설프로젝트였다.
오늘날 한국 경제를 선도하는 조선造船산업의 눈부신 발전도 미래의 사업가능성을 정확하게 예견했던 정 회장의 남다른 투자 감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뭐든지 어렵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어렵고, 쉽게 생각하면 한없이 쉬운 게 일이고 인생이다”라는 자세로 일생을 살았던 낙천주의자였다.
거의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천문학적 숫자의 조선소 건립비용의 해외 조달도 그의 낙천주의적 성격에서 비롯된 유머와 완벽한 사업계획서,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정 회장에 대한 이순신의 천상天上후원 등이 조화를 이뤘기 때문에 가능했다.
영국의 버클레이즈 은행으로부터 조선소 건립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정 회장은 런던의 A&P 애플도어사에 현대의 사업계획서와 추천서를 의뢰했다.
조선소를 지을 미포만의 황량한 모래사장을 찍은 사진만을 가져온 정 회장에게 A&P 애플도어사의 롱바톰 회장은 그에게 회의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이때 정 회장은 호주머니에서 500원짜리 지폐를 꺼냈다. 그리고는 “여기에 거북선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이 1500년대에 철갑선을 만들었다는 증거입니다. 당신네 영국의 조선造船역사는 대략 1800년대부터라고 합니다. 거기에 비하면 300년이나 한국이 앞선 셈입니다. 그만큼 한국은 조선분야에 있어서 많은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동안 쇄국정책으로 산업화가 늦어져 국민들의 능력과 아이디어들이 빛을 보지 못했을 뿐 선박 건조에 대한 잠재력은 결코 적지 않다고 자부합니다”라고 말했다.
자신에 찬 정 회장의 말에 감동한 롱바톰 회장은 버클레이즈 은행의 부총재를 만날 수 있도록 직접 주선해주는 동시에 완벽한 사업계획서를 짜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줌으로써 현대가 조선소 건립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에 대한 내용의 글을 접하면서 “조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열정을 불사르는 정 회장에게 하늘나라의 충무공께서 힘을 보태주신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가져보았다.
사실, 나라사랑에 대한 이순신의 열정이나 정 회장의 열정은 서로 비슷한 점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도전정신과 신뢰를 밑천으로 ‘현대’ 브랜드를 일궈낸 경영의 신
정 회장은 평생 동안 기업 활동을 해오면서 숱하게 부딪치는 난관과 시련 앞에서 조금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평소 그가 즐겨 사용했던 말, 즉 “모든 일은 나에게 맡겨라. 자신이 없거든 집에 가서 누워서 기다려라”, “이것은 시련이지 실패가 아니다. 내가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그것은 결코 실패가 아니다.”에서 그의 강인한 도전정신을 느낄 수 있다. 정 회장은 가족이나 부하 직원들이 자신이 추진하려는 사업에 대해 제동을 걸거나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면, “임자, 해보기나 했어!”라는 퉁명스런 직접화법으로 그들의 나약함과 우유부단함을 사정없이 비판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의지를 끝까지 관철시킴으로써 현대그룹의 비약적인 도약을 일궈냈다.
정 회장은 “경험이 부족하면 아이디어를 내고, 능력이 부족하면 밤이라도 세워라!”를 외치며 끝없는 도전정신을 부추기는 불도저식 리더십을 시종일관 견지했다.
그런 그가 있었기에 현대건설이 태국의 폭우와 밀림 속에서 고속도로 공사를 하고, 포탄이 쏟아지고 독충이 우글거리는 베트남의 메콩 강 델타에서 준설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정 회장은 평소 “사업가는 시작과 끝을 중히 여겨야 한다”를 말하면서 ‘신뢰’와 ‘신용’을 매우 강조했다.
그는 사업을 추진하다가 큰 손해를 봐도 당초 계약의 완수에 최선을 다했으며, 자신의 회사가 입은 금전적 피해를 비싼 수업료로 치부해버리는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에게 일을 맡긴 사람이나 미래의 잠재고객에 대해 확실한 믿음과 신뢰를 줄 수 있었다.
21세기에 더욱 더 그리워지는 인간 정주영
혹자는 말한다. 정 회장의 역할은 끝났다고. 그러나 나는 외친다. 아직도 정 회장의 역할은 끝나지 않았다고.
그는 국졸 학력이 전부였지만 미국의 미래학자들과 견줄만한 뛰어난 혜안과 뛰어난 위기관리능력, 그리고 남들이 흉내 낼 수 없는 변화지수를 가졌던 CEO였다.
또 정 회장은 항상 청년정신으로 미지의 세계와 미지의 비즈니스 분야를 개척해 나갔으며 그 어떠한 시련에도 좌절하지 않았다.
그가 가졌던 기발한 발상과 창의력은 아이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말살하는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고, 남이 가지 않는 길로 과감하게 나갔기에 자신의 삶과 기업이 블루오션에 기초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자세는 21세기 지식정보화 사회의 CEO들에게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덕목이다.
정주영! 비록 그는 세상의 순리에 밀려 하늘나라로 떠났지만, 아직도 그의 소박한 열정과 피 끓는 청년정신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튼튼한 주춧돌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나라가 어렵고 정치인들이 자기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나는 이순신과 정주영의 생각이 많이 난다.
김덕수 교수 |
충북대학교 경제학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석박사과정을 이수하고 1995년도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동안 한국증권거래소 조사부, 고려대학교 강사, KAIST 경제분석연구실 선임연구원, 일본 과학기술정책연구소 객원연구원,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위원, 중등임용고사 출제위원, 국무총리실 소속 산업기술연구회 정부출연구소 기관평가위원, 자유민주연합 혁신위원회 위원장, 대구교통방송 경제해설위원, 공주대학교 기획연구부처장을 역임했다.
현재 공주대학교 교수회장 겸 사범대학 일반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생각을 달리하면 희망이 보인다>, <김덕수 교수의 통쾌한 경제학>, <김덕수 교수의 경제 IQ높이기>, <김덕수 교수의 경제 EQ높이기>, <맨주먹의 CEO 이순신에게 배워라>, <한국형 리더와 리더십>, <게임의 지배법칙으로 자기를 경영하라> 등 다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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