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과 수학이 모르는 지혜

2007. 9. 30. 21:32아름다운 글

45장-추석과 수학이 모르는 지혜
공주대 김덕수 교수의 파워 칼럼
2007-09-24 17:22:19 function sendemail(w,h){ var sWinName = "emailarticle"; var cScroll = 0; var cResize = 0; var cTool = 0; var sWinopts = 'left=' + ((screen.width-w)/2) + ', top=' + ((screen.height-h)/2) + ', width='+w+',height='+h+', scrollbars='+cScroll+', resizable='+cResize; window.open('./?doc=function/mail.php&bo_table=column&wr_id=408',sWinName,sWinopts); } function sendprint(){ var sWinName = "printarticle"; var cScroll = 1; var cResize = 1; var cTool = 1; var sWinopts = 'left='+0+', top='+0+', width='+720+', scrollbars='+cScroll+', resizable='+cResize; window.open('./?doc=function/print.php&bo_table=column&wr_id=408',sWinName,sWinopts); }
이번 추석은 어느 해 추석보다도 많이 기다려졌다. 그동안 바빴던 일신一身을 좀 편히 쉬면서 나름대로 밀린 생각들을 조용히 정리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구들, 친지들의 전화가 이어지면서 나만의 조용한 명상과 휴식을 깨끗하게 단념하고 말았다.

차라리 나를 찾아주는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그들과의 휴먼-네트워크나 견고하게 맺어볼 생각이다. 어차피 인생이 내 뜻대로 되는 게 많지 않으니까 말이다.


추석의 탄생 비밀(?)


옛날 사람들이 추석이란 행사를 만드신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어느 특정 개인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국 문화와 관련된 책들을 읽으면서 나는 추석이 ‘정착’이라는 코드로 해석되는 농경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우리 문화가 끊임없는 ‘이동’이 전제된 유목문화였다면, 추석이란 행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종가 집 종손이나, 장자長子를 중심으로 한 자리에 머물면서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파종부터 수확에 이르는 영농활동을 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준 각종 자연 신神들에게 감사를 드리는 행사가 추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추석의 이면에는 그것보다도 훨씬 더 소중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본다.

한국은 제사를 무척 중시했던 나라다. 요즘에는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되어 가고 있지만, 불과 20~30년 전만 하더라도 추석연휴에 해외관광을 떠나는 것은 천하의 불상놈들이나 하는 짓거리로 비판받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지금은 제사도 사이버 세계에서 하자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으니, 세상이 말세末世에 가까운 것인지 아니면 내가 시대착오적인 사람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추석은 인간의 뿌리인 농촌(제사를 주관하는 종손이나 장자가 머무르는 곳을 의미한다)으로 모든 형제자매들을 불러들여 그들 간의 휴먼-네트워크를 견고하게 해주고, 부모 자식 간의 소중한 인연을 다시금 되새겨보게 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많은 시간을 고속도로나 해안가 포구에서 낭비하면서까지 자신의 뿌리를 찾아 민족대이동을 결행하는 그 모습은 다 자란 연어가 자신의 고향인 강원도 양양의 남대천을 찾아서 회귀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이미 우리들의 DNA에는 자신의 뿌리를 찾아 떠나게 하는 유전인자가 GPS의 도움 없이도 작동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추석이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추석에 내재된 위기의 본질


자신의 뿌리를 찾아 횡적으로는 형제자매들 간에 우의를 다지고 종적으로는 과거(조상)-현재(나)-미래(내 자손)의 끈을 되새겨보는 추석이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주인主因은 인간의 이기심이라고 생각한다.

즉 부모님이 갖고 있는 재산의 분배문제나 어느 누가 부엌에서 고된 일을 더 많이 하는가의 문제를 놓고 형제자매간에 다툼이 일어나는 사례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휴먼-네트워크를 견고히 할 목적으로 만났던 사람들이 ‘서(恕; 내가 하기 싫어하면 남도 하기 싫어하니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강요하지 마라는 의미이다)’에 대한 인식 부족과 작은 이해관계로 인해 총질, 칼부림, 이혼까지 결행하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참으로 다행스런 사람이다. 우리 부모님께서 물려준 재산이 거의 전무하기에 형제자매간에 돈 문제로 다툴 일이 없고, 또 3대 독자이다 보니 집사람이 부엌일을 놓고 잔머리를 굴릴 동서同壻들이 없기 때문이다.

공부하는 과정에서, 또 결혼 초에 돈 없는 설움을 경험하면서 한때는 가난을 물려준 부모님께 서운한 마음을 가진 적도 있지만, 지금은 오히려 부모님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가난한 환경 속에서 자랐기에 어느 누구보다 일찍 돈의 소중함을 터득했고, 매사에 헝그리 정신으로 노력할 수 있는 ‘혼’의 자세를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의 나를 만들어준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돈 때문에 형제자매들 간에 다툴 일이 없으니 집안이 언제나 조용하고 화목한 편이다.

또 추석 차례 상을 준비하고 뒷정리를 하는 과정에서 부엌일의 몫을 다툴 대상이 없으니 집사람은 집안의 대소사를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묵묵히 수행해 나간다.

더구나 ‘남자는 부엌일에 간여해서는 안 된다.’는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났으니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사람이다.


김형석 교수가 들려주는 지혜와 화합의 메시지


명절 때마다 내가 되새겨보는 좋은 글이 하나 있기에 여기에다 소개해 보고자 한다.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인 김형석 박사께서 ‘수학이 모르는 지혜’라는 제목으로 쓰신 글인데, 글 내용이 시사하는 바가 너무 커서 공주뉴스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


옛날 아라비아의 어떤 상인이 임종을 맞게 되었다. 그는 자기 앞에 세 아들을 불러 앉혔다. 그리고는 “내가 너희들에게 남겨줄 유산이라고는 말 17마리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고장의 관습에 따라 똑같이 나눠줄 수는 없으니까 맏아들인 너는 17마리의 1/2을, 둘째 아들인 너는 전체의 1/3을, 그리고 막내아들인 너는 전체의 1/9을 갖도록 해라.”고 유언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재산을 나눠가져야 할 삼형제 간에는 오랜 싸움이 계속되었으나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맏아들은 17마리의 1/2로 9마리의 말을 갖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동생들은 9마리는 17마리의 1/2을 초과하니까 도저히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8마리 반이 되지만, 반 마리는 처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아들은 6마리를 가져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나 형과 동생은 5마리밖에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막내아들은 2마리를 가져야겠다고 욕심을 부렸다. 그러나 형들은 2마리는 17마리의 1/9을 넘으므로 자신들만 손해를 볼 수 없다는 고집이었다.

싸움은 여러 날 계속되었지만, 누구도 만족할만한 해결을 내리지 못했다. 어느 날 이들의 집 앞을 지나가던 한 목사가 있었다.

세 아들은 그 목사에게 아버지의 유산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간청했다. 누구도 만족할만한 결론을 도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목사는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내가 타고 온 말 1마리를 당신들에게 드리지요. 그러면 18마리가 될 것입니다. 맏아들은 그 1/2에 해당하는 9마리를 가지시오. 둘째 아들은 전체의 1/3에 해당되는 6마리를 가지시오. 그리고 막내아들은 전체의 1/9에 해당하는 2마리를 차지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당신에 세 사람은 모두가 아버지가 유언으로 남긴 유산보다도 많은 것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세 아들은 모두 만족해했다. 목사가 얘기해 준 대로 자기들에게 돌아올 말을 나눠가졌다. 일을 끝낸 목사는 “그러면 나는 다시 길을 떠나야 하겠습니다.”는 인사를 하고 도보로 대문 앞을 나섰다.

바로 그때였다. 한 아들이 목사를 뒤따라 나오면서, “목사님! 말을 타고 오셨다가 어떻게 이 사막 길을 걸어가실 수 있습니까? 외양간에 가 보니까 아직도 말이 1마리 남아 있습니다. 우리들이 차지할 것은 다 차지했는데도 1마리가 남아 있으니 이 말을 타고 가십시오.”라고 말했다.

목사는 “그렇습니까? 나에게 말 1마리를 다시 주신다면 타고 가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말을 탔다. 세 아들들은 목사에게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목사는 자기가 타고 온 말에 오른 다음, 먼 길을 떠났다.

생각해보면 세 아들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젊은이들이었다. 목사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언제까지라도 싸우다가 무슨 결과를 가져왔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그 세 아들만이 아니다. 오늘의 우리들 모두가 그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정치가란 인간들이 벌이는 정당 간 아귀다툼과 감투싸움, 그리고 경제사회에서 각종 이권을 놓고 다투는 사람들의 마음이 위 우화에 나오는 형제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의 유산을 둘러싸고 벌이는 형제들 간의 골육상쟁骨肉相爭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올 추석에 대한 염원

나는 일 년 중 에서 추석날 바라보는 달이 가장 크고 밝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모든 분들이 올 추석에는 큰 둥근달처럼 세상을 둥글둥글하게 바라보며 넉넉한 마음으로 형제자매들의 과실을 따뜻하게 덮어주며 돈독한 우애를 만끽했으면 한다.

설령 부모님의 재산문제에 대한 갈등의 소지가 있으면 우리가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배웠던 ‘형님 먼저! 아우 먼저!(밤중에 볏단을 가지고 형님은 아우를 챙겨주려 하고 아우는 형님을 챙겨주려다가 서로 발견하고 부둥켜 울었다는 얘기이다)’를 실천해 나갔으면 어떨까 싶다.

또 부엌일은 먼저 보는 사람이 먼저 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일하면 어떨까 싶다. 자원봉사가 봉사 가운데 최고라고 한다.

또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적선을 베풀면 집안에 경사가 있다는 의미다)’이라는 얘기가 있다.

형제지간에도 더 많은 봉사와 선행으로 일관하면 경사로운 일이 생긴다는 마음으로 다른 동서들보다 좀 더 느긋한 마음과 여유로 부엌일을 한다면 올 추석이 보다 풍요롭고 아름다운 추석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싶다.

남을 위해서도 봉사하는데, 내 피붙이들을 위해서 내가 봉사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모든 분들에게 평화와 사랑, 그리고 행복이 충만한 추석이 되길 기도한다.




    김덕수 교수
충북대학교 경제학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석박사과정을 이수하고 1995년도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동안 한국증권거래소 조사부, 고려대학교 강사, KAIST 경제분석연구실 선임연구원, 일본 과학기술정책연구소 객원연구원,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위원, 중등임용고사 출제위원, 국무총리실 소속 산업기술연구회 정부출연구소 기관평가위원, 자유민주연합 혁신위원회 위원장, 대구교통방송 경제해설위원, 공주대학교 기획연구부처장을 역임했다.

현재 공주대학교 교수회장 겸 사범대학 일반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생각을 달리하면 희망이 보인다>, <김덕수 교수의 통쾌한 경제학>, <김덕수 교수의 경제 IQ높이기>, <김덕수 교수의 경제 EQ높이기>, <맨주먹의 CEO 이순신에게 배워라>, <한국형 리더와 리더십>,  <게임의 지배법칙으로 자기를 경영하라> 등 다수가 있다.
< 공주뉴스=김덕수시민 기자/ news@gongjunews.net> >> 김덕수시민 기자 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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