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전설 담은 백록담에 앉다

2008. 11. 8. 22:32아름다운 글

태고의 전설 담은 백록담에 앉다 
유옥희 기자의 한라산 산행기
  글쓴이 : 이건용     날짜 : 08-11-08 17:09    
▲ 한라산 백롬담.
ⓒ 웅진산악회 제공

2008년 10월 1일, 웅진산악회의 100회째 산행일정은 제주도 한라산이다. 2박3일 중 오늘이 그 첫 발을 내딛는다.

지금 공주는 제54회 백제문화제가 막이 올라 축제열기로 뜨겁다. 그 북적임을 뒤로하고, 또 내 일상의 간단치 않은 일손도 그냥 접어버리고 무작정 금강둔치로 향해 버스에 올랐다.

불안해하는 날 보고 “문밖을 나서는 순간 집은 모두 잊으라”던 남편이 하는 말이 스쳐간다. 외국생활을 오래한 남편은 언제나 나보다 생각이 한발 앞서 어려운 상황에선 늘 현명한 판단을 내려준다.

같이 신청했던 몇몇 회원들이 못 가게 된 건 유감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 그래, 그냥 떠나자. 떠나는 거야. 만감이 교차했지만 남편의 마지막 그 말에 큰 힘을 얻는다.

ⓒ 웅진산악회 제공.

이렇게 10월 첫째 날은 여행의 설레임으로 시작한다. 오후 1시 둔치에 집결, 4시30분 비행기를 타기위해 회원들을 태운 버스는 군산공항으로 미끄러져 갔다.

오후 5시쯤 제주에 도착, 미리 예약된 ‘대전가나 버스’라고 쓴 차에 몸을 싣고 ‘호텔 나비스’로 향한다. 밤개워 어로작업에 나선 선박들이 밤 바다위에 별빛보다 아름답게 반짝인다. 해변에서 가까운 너는 오징어 배, 먼 너는 은빛 갈치를 낚는 배. 또 그렇게 하루가 저문다.

둘째 날 아침, 성판악을 향해 달려가는 차창 밖으로 주렁주렁 감귤이 스친다. 풍요로운 가을 아침이다. 산행 출발지인 성판악에 8시에 도착, 기대되는 한라산 산행을 시작했다.

키 작은 산죽들이 지난해 중국 장백산에서 오늘 한라산까지 웅진산악회 100회째 대장정을 반겨준다. 한 시간쯤 올랐을까, 배우 최진실씨가 자살했다는 믿기지 않는 비보가 산중을 뒤흔든다.

참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하고 성공한 삶인지, 삶의 목적과 가치관이 흔들리는 미로시대에 사는 것 같다.

ⓒ 웅진산악회 제공.

비교하는 마음부터 던져버리고, 남처럼 살려하지 말고, 특별한 나만의 인생을 사는 거다. 징글벨 작곡자인 존 파이어펀트는 명문대가의 후손이다. 그의 조부는 예일대학교의 설립자다. 그러나 그는 하는 일마다 실패했다.

사람이 너무 좋기만 해 교수, 변호사, 목사, 포목상, 작곡가, 말단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직업을 전전하면서 가솔들을 거느릴 능력조차 없었다.

이렇듯 실패의 연속이었던 그가 눈 오는 어느 겨울날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 선물로 작곡한 ‘징글벨’이 매년 12월 크리스마스 때만 되면 모든 이들의 가슴에 희망과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다.

누가 이 노래를 불행한 사람이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으며, 누가 그를 실패한 인생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자기의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할 때다.

ⓒ 웅진산악회 제공.

바다를 향해 흐르는 강물처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오고 또 가는 것처럼. 나무계단을 편히 걷다보면 금 새 돌밭 길. 가도 가도 끝도 없는 돌밭 길.

힘든 암벽도 없어 쉬울 것 같은데, 인내심이 필요하다. 백록담이란 큰 선물을 얻기 위해 참아내고 또 참아내는 거다. 완주하게 되면 더할 수 없는 행복이겠지만, 다다르지 못하면 또 어떠하리.

화산폭발로 생겨난 한라산 백록담은 둘레가 1.7km, 깊이가 108m, 넓이는 0.21km에 이르는 분화구다. 예로부터 신선들이 흰 사슴을 타고 놀았던 연못이라는 전설에서 비롯된 이름이라는데..

겨우내 쌓였던 눈이 늦은 봄에도 녹지 않아 은빛처럼 하얗게 빛나는 설경을 ‘녹담만설(鹿潭晩雪)’이라 해 영주십경(瀛州十景)의 하나로 불린다.

백록담은 한라산 특산물을 포함한 167여종의 식물이 자생하며, 분화구 안 구상나무 숲에는 수 십 마리의 노루가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다.

ⓒ 웅진산악회 제공.

이렇게 힘든 여정을 거쳐 나는 정상 백록담에 발을 내디뎠다. 뿌듯함이 밀려온다. 전설속의 하얀 사슴은 보이질 않는다.

계속된 가뭄에 바닥을 드러낸 백록담, 몇몇 노루의 갈증도 채우기 힘들어 보인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 여기저기 주목나무들이 태고의 아름다운 전설을 품고 짐짓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다.

계곡없는 메마른 산행에 지치긴 했어도, 제주에 왔으니 이렇게 삼다도의 돌 맛은 제대로 느끼고 간다. 누구는 한라산 설경을 보러 또 오자는데, 체력이 뒷받침 안 되는 나로서는 이쯤에서 만족할 밖에.

어서 내려가자, 서둘러 내려가자.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창 넓은 해수탕으로.
< 특급뉴스=이건용 기자/ leeguny98@empal.com> >> 이건용 기자 의 다른기사 보기